나는 84세다. 1929년 11월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생존자의 한 사람(당시 광주고보 2년생)이다. 이 운동 68주년을 뜻깊게 맞으면서 이 글을 쓴다. 68주년은 두가지 점에서 뜻깊다. 하나는 이 운동의 정사(正史)가 이제야 발간됐다는 점이다. 그동안에는 그 진상과 의미가 잘못 알려졌다. 일제는 한일학생간의 사소한 충돌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축소하다가 여의치 않자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에 따라 좌익학생들이 주도한 계급투쟁으로 왜곡했다. 해방후 역대 정부는 정권의 손익계산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하거나 어물쩍 자리매김했다. 많은 학자들도 일제의 재판기록 등에만 의존,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지 않았고 심층분석을 게을리했다. 많은 국민은 「댕기희롱사건」이 도화선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록됐다. 그러나 1929년 10월30일 나주역 구내에서 발생했다는 일본중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사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한국인 여학생 3명이 개찰구를 빠져나올 무렵, 열차 안에서부터 장난을 치고 있던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스에키치 다나카 등이 서로 쫓고 쫓기느라 한국인 여학생 이광춘 등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는 고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인 남학생들이 이를 트집잡아 일본인 남학생들을 윽박질렀고 한국인 남학생 박준채(朴準埰)는 후쿠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이것이 진상이다. 당시 일본인 통학생들은 한국인 통학생들에게 기가 죽어 한국인 여학생들을 희롱할 엄두도 못냈다고 통학생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며칠후 광주에서 학생시위사건이 발생하자 당시의 우리측 신문들은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나주역 사건을 「댕기희롱사건」으로 각색보도했고 일제당국은 「어린애들의 장난」이라며 사건자체를 축소했다. 실제는 오래 누적된 광주고보생들의 애국반일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자 일제당국은 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조선총독부의 실책을 본국으로부터 추궁받지 않기 위해 직접 관련도 없는 「성진회」와 「독서회」를 배후세력으로 지목, 백수십명을 구속했다. 구속자 중에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많았다. 68주년이 뜻깊은 또다른 이유는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주변에 「독립운동 기념회관」과 「시민공원」을 만들어 준공테이프를 끊는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68년만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행사로 치르게 됐다. 이곳이 후세에게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외국인들에게는 국제적 관광지가 됐으면 좋겠다. 이기호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