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운명을 백척간두로 몰아세웠던 임진왜란.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간데 일등공신을 들라면 단연 서애 유성룡일 것이다. 난세를 이겨낸 그의 위기관리능력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능수능란한 외교력, 투철한 애민정신, 인재를 알아보는 날카로운 눈, 합리적 현실적인 업무처리 등을 들 수 있다. 외교적 역량. 왜의 조선침략은 명을 치기 위한 것(정명가도·征明假道)이라는 점을 내세워 명의 원조를 이끌어낸 것이나 명이 선조를 갈아치우려했던 술책을 무마시킨 것 모두 서애의 외교력 덕분. 그는 과거급제 직후 외교부서에서 쌓은 경험을 통해 나이 서른에 이미 탁월한 외교관이 돼 있었다. 애민정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강한 군사력 못지않게 백성의 심리적 안정이 중요한 법. 배고픈 백성에게 전투의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애는 그래서 세금 부역 등을 가볍게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전시(戰時)에도 기근에 허덕이지 않도록 구황식물조사 등 각종 조치를 취했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 임란 발발 1년전, 좌의정이었던 서애는 말직에 있던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을 의주목사 전라좌수사로 발탁하는 형안을 보여주었다. 이순신 권율이 없었더라면…. 합리적 현실적 업무처리. 서애는 한쪽에 치우침이 없었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 합리적으로 해결해나갔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반대파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정적(政敵)이었던 북인세력은 「줏대가 굳지 못해 이해문제에 당면해서는 동요를 면치 못했고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경우가 적고 자신의 몸과 지위를 구차하게 보전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골이 깊은 당쟁의 후유증이 아니었을까. 위기관리의 일인자 유성룡. 그의 부음이 한양에 전해지자 도성의 백성들은 그가 살던 빈집에 몰려들어 『유공(柳公)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애통해했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