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 병자 양란 이후의 17세기 조선사회는 명청(明淸)교체로 국제질서가 변화하고 안으로는 전란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인 급격한 동요와 혼란이 가중된 시기였다.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1586∼1647)은 이러한 난국을 몸소 겪으며 전후 국가재건 민생회복의 책무는 물론 대륙의 무력적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정치적 책임도 감당해야만 했다. 그는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병조좌랑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경기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병자호란 후 그의 말년엔 좌의정 영의정에 오르는 영예도 누렸다. 인조반정 이후의 정국은 서인의 주도 아래 남인과의 연합도 시도됐던 정치구도였다. 그러한 정세에서 그가 제시한 시정개혁은 현실에 바탕을 둔 「변통변법(變通變法)」이 주류였고 이미 시행되고 있는 기존의 법만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정치관이라고 비판하였다. 그가 제시한 양전(量田)개정과 서얼허통(庶孼許通) 등 12개항의 개혁안은 현실에 기초한 그의 정치적 이상을 결집한 것으로 현실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사회개혁의 한 처방이었다. 그는 『정의가 곧 공론공도(公論公道)인줄 아는 시속(時俗)을 바로잡지 않으면 좋은 법이나 훌륭한 정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하여 당시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같은 그의 정론은 격변기 사회를 선도하기 위한 고뇌와 함께 명분과 실리론의 양극을 조화롭게 조율하여 난세의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1636년 후금(後金)과의 정치적 긴장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척화론(斥和論)이 공론으로 집약되자 한성판윤이던 최명길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화의(和議)를 주장했다.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를 비롯한 척화론자들의 총공격이 그에게 가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끈기있게 화의를 추진,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으나 호병(胡兵)은 이미 도성에까지 육박한 이후였다. 왕자와 비빈 원로대신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최명길은 몸소 적진에 들어가 출병의 부당성과 맹약위반을 내세워 시간을 끌었고 왕은 그 덕에 겨우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할 수 있었다. 최명길의 화의는 구국에 그 목적이 있었으며 자강(自彊)을 전제로 한 치국의 방편이었다. 시공(時空)을 적절히 이용해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국력배양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실리론적 정론이었다. 그의 그러한 주장은 척화론자들의 참수론까지 불러일으켰으나 그는 반대론자들을 설득하고 패전국으로서의 수모를 홀로 감당하며 정치적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그는 척화 화의 양론이 극도로 대립해 고성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항복문서를 작성, 삼전도에서 국왕이 적장 앞에 무릎을 꿇고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는 국가적 수모를 맞아야 했다. 「대국을 거역하여 스스로 병화를 자초하였고… 그 죄를 알고 있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여 대청국을 섬기겠다」는 치욕적인 항복문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명과 종사의 안전을 구했으나 명분과 의리를 저버려 종묘사직을 욕되게 했다는 오명이 뒤따랐다. 실리를 위한 화의였지만 그 결과는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케하고 군주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으며 왕세자와 국정 대신들이 인질로 끌려가고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적지에 억류되는 참상을 빚게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명분을 지키려다 임금과 백성이 도륙당하는 역사의 단절을 초래하는 것보다는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한다는 실리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위기관리의 주역이었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란후 그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포로송환 교섭을 벌이는 등 산적한 외교문제 처리에도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귀국 후엔 그가 쓴 항복문서를 찢어버리면서까지 화의에 반대했던 김상헌(金尙憲)의 절의를 칭찬하며 『나같이 항복문서를 쓰는 사람도 있어야하고 찢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척화론 주화론 모두 나라를 구하는 방편이었음을 천명하는 화합론이었던 것이다. 승전국 청나라의 정치적 협박이 있을 때마다 그는 솔선하여 비장한 각오로 치상(治喪)도구까지 갖추고 적지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였고 때로는 청 황제가 인조를 문책할 때 대신 갇히는 고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는 명분론자들의 힐책과 비난에 개의치않고 자신의 실리주의 논리를 꿋꿋이 지켜나갔다. 그러한 신념과 사상으로 명분과 현실을 조절하고, 시류의 고루한 청의(淸議)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정치적 신념, 사상체계는 그의 아버지 최기남(崔起南)에 의해 전수된 가학(家學)에 힘입은 바 크며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을 통해 성숙되었다. 최기남의 외가는 이미 양명학과 접촉했던 남언경(南彦經)가계였다. 최명길이 명분에만 집착하지 않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에 접근할 수 있었음은 당연했고 그리하여 주자학에 바탕하면서도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병자호란을 당하여 화의를 주창하게 된 것은 양명학에 크게 힘입었다」는 후대의 지적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실리없는 형식이나 명분만을 고집한 학자들의 허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최명길의 수기지학(修己之學)은 엄정한 논리, 변함없는 의리론을 통해 잘 설명할 수 있으며 치인(治人)에 있어서도 도덕과 처세를 한결같이 바꾸지 않고 뚜렷이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으뜸가는 신념있는 선비임에 틀림없다. 이은순(한국외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