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를 보러 오신 시어머니께서 두고 쓰라는 말씀과 함께 비밀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무엇일까 궁금하던 나는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동시에 짜증이 났다. 스테인리스로 된 표면이 잔뜩 녹슨데다 손잡이를 잡고 드르륵 돌려야 하는 그 옛날 남편이 쓰던 연필깎이였다. 속으로 「요즘 편리하고 예쁜 자동연필깎이가 얼마나 많은데 보기 싫게 낡고 구식인 연필깎이를 짐만 되게 뭐하러 가져 오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전 아이를 낳고 조금 지난 언젠가도 손위 시누이의 두 아이들이 쓰던 옷가지며 기저귀 등을 잔뜩 가지고 오셨던터라 아이에게 새 옷과 예쁜 것들을 사주고 싶었던 나는 짐만 늘어나게 생겼다고 짜증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이것 좀 봐요. 어머니께서 이런걸 또 가져오신거 있죠』 하며 눈을 흘기며 들이밀었다. 그런데 순간 남편의 눈시울이 촉촉해지는게 아닌가. 남편은 그리움 가득한 눈빛으로 연필깎이에 고정했던 시선을 내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 연필깎이는 내가 22년 전에 썼던거야. 그때 우리집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데…. 그 어렵던 시절에 내게 주신다고 어머니께서 큰맘먹고 사주셨던거야』 하며 말을 흐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칼날이 녹슬었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과 함께 내게 연필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설레는 마음으로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는 드르륵 드르륵했다. 잘 깎여 나오는 연필을 보며 남편은 크게 안도하는 모습이더니 『어머니께서 나중에 손자 주신다고 했는데 여태 보관하고 계셨구먼』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예쁘고 새것만 좋아하고 물려받은 옷가지를 하찮게 여긴 것하며 아기를 키우면서 천기저귀를 써도 되는데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일회용기저귀를 써대며 낭비했던 것. 조금만 낡아도 다시 사야 한다고 우기던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난 이 연필깎이를 훗날 내 아이에게 사용하게 할 생각이다. 아이는 분명 만족하지 못해 투덜거리겠지만 그때마다 할머니의 근검절약 정신과 사랑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오늘 시간이 나는대로 물려받았던 옷가지들 가운데 쓸만한 것들이 있는지 다시 뒤져봐야겠다. 염지혜(서울 도봉구 방학4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