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李會昌(이회창)후보의 「오늘」은 두사람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부친 이홍규(李弘圭·93)옹과 金泳三(김영삼·YS)대통령이다. 아버지 이옹이 「대쪽 법조인 이회창」의 토양이었다면 김대통령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후보를 대중정치인으로 성장시켰다. 두사람은 모두 이후보에게 「동화(同化)대상」이면서 동시에 「극복대상」이었다. 이후보와 김대통령의 「숙명적 만남」은 89년4월 동해시 보궐선거때 시작된다. 이때부터 이후보는 김대통령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만남과 결별을 반복한다. 88년7월 대법관 겸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된 이후보는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당선자를 비롯한 4당후보와 선거사무장을 무더기로 고발했다. 이에 민주당이 선관위를 비난하자 이회창선관위원장은 즉각 김영삼민주당총재에게 경고서한을 보낸다. 이후보와 YS의 관계는 첫 단추부터 갈등으로 시작된 것이다. 집권에 성공한 김대통령은 93년2월 이후보를 감사원장에 임명했다. 이후보는 여기서도 율곡비리와 관련해 전직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강행하려다 청와대와 마찰을 빚었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은 93년12월 이후보를 국무총리로 중용했다. 일각에서는 『실권없는 총리를 시켜 「대쪽」을 고사(枯死)시키려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보는 「얼굴마담」을 참지 못했다. 재임 4개월7일만에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운영과정에서 헌법상 보장된 총리의 권한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마찰을 빚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개혁의 상징과 같던 이총리의 사임은 김영삼정부 개혁드라이브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반대로 이후보는 일약 국민적인 인물로 부각됐다. 95년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김대통령은 96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이후보에게 「구원 등판」을 요청했다. 신한국당에 입당한 그는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김대통령은 올해초에는 한보사태와 김현철(金賢哲)씨 문제로 곤경에 몰리자 그를 신한국당 대표에 임명, 국면전환을 기도했다. 이후보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대표 프리미엄」을 활용, 지난 7월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가 됐다. 하지만 「싸움」은 그 다음부터였다. 아들의 병역문제로 지지율 하락의 수렁에 떨어진 이후보는 다시 「후보사퇴」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김대통령의 지원으로 수렁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청와대는 냉담했다. 이후보가 택한 최후의 승부수는 「김대통령 탈당 요구」였다. YS탈당 요구는 TK(대구 경북)지역의 민심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그는 마침내 지지율 하락의 기나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YS의 국민신당 지원설을 제기, 멀찌감치 달아나던 이인제(李仁濟)후보의 발목을 잡는 데도 성공했다. 이후보가 YS와의 오랜 투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은 남다른 「강기(剛氣)」때문이다. 그 강기는 아버지 이옹으로부터의 「내림」이다. 이옹은 청주지검 검사로 있던 시절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를 구속했다가 「해방후 검사출신 구속 1호」를 기록한 「원조 대쪽」이었다. 부친의 영향 때문인지 판사시절의 이회창도 말 그대로 「대쪽」이었다. 81년 마흔 여섯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원판사가 된 뒤 재임 5년 동안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넘겨진 46건 가운데 무려 13건의 소수의견을 냈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회창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다. 그의 소신이란 것도 인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다. 정치권에서도 『정치인 이회창은 대선자금 및 전,노사면 문제, DJ(김대중국민회의총재)비자금 문제 등 고비고비마다 변신을 거듭했다. 그의 대쪽 이미지도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난이 있다. 그의 소신이 계산된 것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이후보가 그 소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박제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