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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후보가 걸어온 길]세대교체 업고 급부상

입력 | 1997-11-26 19:53:00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후보는 「신한국당 경선」이라는 짧은 기간을 통해 순식간에 중앙정치무대에 진입한 풍운아다. 그는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뒤 이회창(이회창)후보 아들의 병역문제가 터지자 『정권재창출이 무망해졌다』며 경선에 불복하고 탈당,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경선불복은 두고두고 이후보의 발목을 잡는 원죄(원죄)가 됐다. 이후보는 출사표를 던지며 세대교체와 3김청산, 국민정치시대 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그는 지난 3월 하순 경선출마를 선언하던 8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선에까지 도전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지난 95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깜짝 놀랄만한 젊은 후보」발언을 했을 때도 재선의원출신의 젊은 도백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보가 일약 대선주자로 떠오른 것은 경선 당시의 TV토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49세의 젊은 이지사는 TV토론에서 시종 당당하고 과단성있는 태도로 「젊은 일꾼 대통령론」을 주창했다. 한보사태 등으로 기성 정치에 식상한 대의원들은 그에게 많은 지지를 보내며 세대교체 열망을 표시했다. 그는 경선투표에서 이한동(李漢東)고문을 근소한 표차로 물리치고 결선에까지 오르는 파란을 연출했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두꺼운 벽을 깨지 못하고 이회창후보에게 20%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이후보는 수차례에 걸친 김대통령과 측근의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마를 결심, 대선판도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이후보가 「정치적 아버지」로 부르는 김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9년 31세의 늦깎이로 사법고시에 합격, 2년여간 대전지법판사를 지낸 뒤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그는 민주화항쟁의 열기가 높던 87년 9월 경복고 선배이자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총재비서실장인 김덕룡(金德龍)의원의 소개로 김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보는 당시 김대통령이 이끈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정계에 입문했고 88년 13대 총선에서 연고가 없는 경기 안양에 처녀출마해 당선,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보는 88년 국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에서 날카로운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다. 김대중(金大中)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80년 군사재판의 국가보안법 관련 부분은 군법회의가 관할권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 주목을 끌기도 했다. 89년 통일민주당의 대변인에 발탁된 그는 3당 합당시 군말없이 김대통령을 따라 민자당에 들어갔고 92년 14대 총선에서 경기도 내에서는 유일한 민주계의원으로 당선, 재선의원이 됐다. 현 정부 출범과 함께 45세의 젊은 나이로 노동부장관에 발탁, 최연소 각료가 됨으로써 그의 정치행로는 더욱 탄탄해졌다. 이후보의 당차고 도전적인 자세는 95년 경기지사후보 경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그는 민정계인 임사빈(任仕彬)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당내 민주화를 주장하며 단기필마로 출전, 2백여표의 차이로 당선된다. 이후보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다. 48년 충남 논산에서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도 1년 늦게 입학했다. 백석초등학교와 논산중학교 재학 9년 내내 반장을 맡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학생회장에 뽑히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 경복고를 거쳐 서울대법대에 진학한 이후보는 이념서클인 사회법학회에 가입, 3선개헌 반대시위 등 학생운동에 앞장섰고 각종 집회의 단골연사로 활약하며 대중정치인의 기질을 발휘했다. 대학 4학년 때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뒤늦게 고시공부에 뛰어들었으며 이때 김학원(金學元)비서실장 등 현재 그를 돕고 있는 「소피아고시원」인맥이 형성됐다. 소년시절 이후보는 이순신(李舜臣)과 같은 장군을 꿈꿨으나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을 따랐다고 한다. 〈이원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