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뜸 욕설로 시작하는 독자전화가 있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의 목소리다. 『… 나라를 어떻게 관리했기에 깡통 차는 신세가 되었단 말이오. 경제를 망쳐놓은 대통령은 지금 당장 하야하라고 쓰시오. 석달밖에 안남았는데 지금 물러나면 그 혼란은 누가 감당할 거냐구요? 총리가 대신해도 문제없어요』 오죽 화가 났으면 이러는 것일까. 나라 경제가 벼랑끝에 몰리고 민심이 이리 흔들리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국민들이 분노할만도 하다. ▼ 수술대 오른 한국경제 ▼ 그런 독자전화가 아니더라도 지금 나라 안은 극도의 심리적 불안과 정신적 공황상태다. 모범생 소리를 듣던 우리 경제가 하루아침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으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누구 탓만 해본들 엎질러진 물이다. 개탄 비난만 하고 있기엔 나라 형편이 너무 심각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현실은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책임문제는 그것대로 따지더라도 다시 한번 지혜를 모아 재기를 도모하는 일이 급하다. 기아가 부도위기에 몰렸을 때만 해도 국가 자체가 국제 부도유예협약 대상국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기아나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나 추락하는 과정은 닮은 꼴이다. 악성 루머가 자금빼가기를 부추겨 유동성위기를 맞은 것도 그렇지만 우물쭈물 시간을 끌며 실기(失機)를 거듭한 결과 대외신뢰도가 급락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기업이든 국가든 재무구조가 건실하고 체질이 튼튼했다면 오늘같은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에 따른 거품을 빼고 안정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주장은 진작부터 제기돼왔다. 특히 무한경쟁의 세계무역기구(WTO)체제하에서 더이상 늦출 수 없는 발등의 불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것을 외면해 왔다. 아니,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마디로 정경유착의 부패고리가 원흉(元兇)이다. 대선자금의 원죄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정부주도의 수술은 어렵게 되어 있었다. 결국 한국경제는 IMF의 입회 감독아래 타율적인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스스로 자기병을 고치기 어렵다면 강제입원도 한 방법이다. 창피한 노릇이긴 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다. 차제에 정경유착과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악성종양을 과감하게 도려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졸부의 천박한 거품잔치를 끝내고 국제적 기준에 걸맞은 합리주의와 투명성이라는 새 살이 우리 사회에서 돋아날 수 있다면 그런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없다. 그러나 그를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와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채권자로서 IMF가 챙기고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저성장과 내핍체제다. 기업 금융기관의 정리와 대대적인 군살빼기가 시작되면 고물가 고실업은 필연적이다. 무엇보다 사회보장제도가 미흡한 나라에서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내몰리는 실업의 고통은 비참할 것이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최소한 2,3년은 그런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 이 수술에는 고통을 덜어줄 마취제도 없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나머지 한국경제는 이제 길고도 잔인한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 고통극복 자신감 절실 ▼ 그렇다고 여기서 좌절하여 주저앉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저력이 남아 있다. 지나친 비관도 지나친 낙관도 금물이다. 온 국민이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힘을 합친다면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바로 보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와 자신감이다. 스스로 살 의지가 없으면 아무리 수술이 잘 되어도 환자가 죽는 수가 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 시련의 겨울은 짧을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남중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