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고 치세(治世·태평성대)에는 기능인이 요구된다면, 난세와 치세의 중간쯤엔 어떤 인물이 바람직한가. 이 물음을 풀어가는데 지봉 이수광(1563∼1628)을 하나의 표준으로 그려볼 수 있다. 지봉이 뛰어난 문필관료로서 문명(文名)을 날렸던 선조시대는 이른바 목능성세(穆陵盛世)로 불릴 만큼 문인재사가 많고 문학이 화려하게 꽃핀 시기였다. 그러나 일찍이 율곡(栗谷)이 지적한대로 담장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는 중쇠기(中衰期)의 그늘이 화려한 문명 속에 감춰지고 있었다. 퇴계(退溪)와 율곡이 뿌린 성리학은 개혁의지를 상실하고 출세를 위한 도구학문으로 변질되었다. 왕조의 문명은 왜란의 강타를 받으면서 빛과 그늘이 명백하게 노출되었다. 성리학의 위력은 정신면에서 크게 발휘되었다. 2백년간 심어놓은 충의정신이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긴 왕조의 영광은 상처투성이었다. 중흥을 다지는 문명의 일대 변신이 요구되었다. 도구학문으로 전락한 성리학을 다시금 깨끗하고 힘있는 국가건설 이념으로 되돌려야했다. 도구학문을 실천학문으로 바꾸는 성리학의 자기혁신, 이것이 실학의 탄생이요, 그 선두에 지봉이 서 있었다. 전쟁의 참화를 직접 목격하고 외교관으로서 중국을 세번이나 왕래하면서 국제정세를 예민하게 관찰한 지봉은 일평생 무실(務實)을 강조했다. 「실」은 「거짓」에 대한 반대다. 선비들이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개인의 출세와 사욕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행태, 이해관계에 따라 아침에 친구가 되었다가 저녁에 적으로 바뀌는 붕당갈등, 바로 이것이 거짓이다. 책을 많이 읽고 외운다고 훌륭한 선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선비가 되려면 먼저 마음을 철저하게 다스려 사(私)를 불식해야 한다. 사를 버려야 큰 공(公)을 이룬다. 나를 버려야 천하를 끌어안을 수 있다. 이기(利己)를 버린 사람만이 이타(利他)의 정치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요, 참된 학문이다. 지봉은 이해를 따라 이합집산하는 선비를 멀리하였다. 특히 도덕이 무너진 광해군시대에는 벼슬을 버리고 동대문밖 오두막집에 칩거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세속의 친구를 버리고 경전 속의 성현을 벗으로 삼았다. 비우당(庇雨堂)이라고 스스로 부른 그 집은 외가 5대조 할아버지인 유관(柳寬) 정승이 우산을 받치고 검소하게 살았던 바로 그집이었다. 지봉은 「성시(城市) 속의 은자(隱者)와 산림(山林)」을 자처하면서 청백(淸白)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지봉의 대표작 「지봉유설(芝峰類說)」(20권·1614년)은 바로 이곳에서 저술되었다. 그가 방대한 자료를 모아 문화백과사전을 쓴 것은 무실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명개혁의 지침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명국가임을 지리 역사 문학 예술 물산 풍속 외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낱낱이 재확인하고, 나아가 이 세상에는 유교문명권 이외에도 기독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그리고 불교문명권이 있다는 전제하에 50여국의 풍물을 소개하면서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다. 이로써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국토와 민족문화를 연구하는 국학(國學)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야말로 민족혼과 국제감각이 조화를 이루고 철저한 한국인이면서 세계인이기도 한 지봉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명저이다. 이 책이 후세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해군 말년에 그는 창덕궁 서쪽의 침류대(枕流臺)계곡에 모여든 장안의 문인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이들이 서울의 실학을 일으키는 선구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채신잡록(采薪雜錄)」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내어 주자학과 다른 독창적인 성리학 이론을 전개하였다.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양명학의 기미가 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봉이 다시 벼슬길에 나간 것은 유교정치의 복귀를 선언한 인조반정 이후이다. 회갑을 넘긴 원로정치가로 성장한 그는 도승지 홍문관제학 대사간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요직을 맡으면서 인조의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12개조의 중흥장소(中興章疏)를 올렸다. 이글은 그가 관료와 학자의 두 길을 걸으면서 쌓은 무실의 정치경륜을 총망라한 명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베풀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거두라는 요지의 개혁안은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서부터 출발하여 민생을 다독거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중흥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깨끗한 정치와 민생안정 그리고 국방강화로 요약된다. 인조대의 중흥정치는 호란의 타격을 받으면서 다시 흔들리고, 지봉도 정묘호란 다음해에 66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지봉이 남기고 간 실학은 왕조 중흥의 정신적 토대를 확고하게 놓았다. 조선왕조가 왜란과 호란의 충격과 상흔에도 불구하고 18세기의 르네상스를 이룩해 3백년의 수명을 연장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과격한 혁명가도 아니고 보수안일에 빠진 기능인도 아닌 지봉과 같은 깨끗한 선비들이 민족혼을 깨우치고, 세계를 끌어안으면서 부단한 자기혁신을 거듭한 까닭이다. 세계화의 진통을 겪고 있는 오늘, 지봉의 가르침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한영우 ▼ 약력 △문화재위원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서울대 규장각관장 역임 △저서 「정도전사상의 연구」 「조선전기 사회사상연구」 「한국민족주의 역사학」 「다시 쓰는 우리역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