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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심칼럼]바뀌어야 한다

입력 | 1997-12-05 20:23:00


나라가 망해도 이렇게 폭삭 주저앉을 수가 없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바로 어제까지 국민소득 1만달러를 자랑하던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었다. 그런 나라가 국민소득 6백달러인 중국에까지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내미는 신세가 됐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총리는 달러 구걸에 손이 발이 된 우리의 처지를 「주권을 포기해버린 거지」라고 동정했다. ▼ 정부 거짓말에 더 분통 이제 우리의 운명은 워싱턴에서 파견된 몇몇 테크노크라트들의 랩톱 컴퓨터에 맡겨졌다는 것이 미국 타임지의 관측이다. 나라의 운명이 재정경제원에 설치할 국제통화기금(IMF) 상주사무소에 위탁되는 서글픈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국민들로서는 IMF 구제금융이 돈과 함께 경제부총리를 수입하는 것쯤 되리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굴욕이지만 나라를 파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다급한 사정을 짐작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고보니 모셔올 사람은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총독이었다.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우리 경제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빌려준 돈을 떼이지 않고 제때에 받아가기 위해서 기업도산도 실업도 물가도 세금도 알 바 아니라는 식이다. 나라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져도 그것은 그들 일이 아니다. 타임지의 지적대로 한국은 경제주권을 상실하고 식민지시대의 고통을 새롭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나라가 「보호국」이 된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됐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92년만에 이번에는 IMF라는 국제금융자본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20세기를 보호국으로 맞아 숱한 고난과 희생을 치르며 「아시아의 용」으로 승천했던 나라가 그 20세기를 또 다른 보호국 신세로 마감해야 하는 역사의 희롱이 분하고 원통하다. 나라의 북쪽은 쌀을 구걸하고 남쪽은 돈을 구걸하는 민족적 치욕으로 21세기를 맞아야 할 처지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에게 92년 전의 민영환(閔泳煥)과 조병세(趙秉世)는 없다. 나라를 이렇게 망쳐놓고도 잘못을 빌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작년말의 노동법사태 이후 한보사태와 기아사태를 무능과 무책으로 일관한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오만했던 경제부총리도 사죄의 말은커녕 꿀먹은 벙어리다. 기아사태가 3개월동안 표류하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의 늪으로 빠져들고 그것이 결국 걷잡을 수 없는 금융위기를 몰고왔는데도 거짓말까지 동원해 국민을 속인 경제부총리를 은근히 고무한 일부 언론도 있었다. 캉드쉬 IMF총재는 과거 우리의 경제모델을 「벗어버려야 할 낡은 신발」에 비유했다. 외국의 언론들은 우리의 이 낡은 신발이 개발독재시대의 정부주도형 성장제일주의 재벌중심주의 관치금융 정경유착과 부패구조라고 일제히 입을 모은다. 정부 재벌 은행의 유착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우리 경제를 되살릴 수 없다는 충고다. 맞는 말이다. 바꿔야 한다. IMF 신탁통치가 이러한 개혁에 도움이 된다면 수치스러운 타율일지라도 더 없는 약이 될 수 있다. ▼ 대선 계기로 다시 뛰자 문제는 그들의 강요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이 정치 경제 사회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조직하고 이끌어갈 정치의 리더십이다. 국민의 고통과 좌절, 분노와 저항을 달래고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누면서 나라의 미래를 헤쳐나갈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이다. 이제 12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대선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한번의 기회일 수 있다. 절망으로 주저앉을 때가 아니다. 모두 나라의 틀을 바꾸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일어나 뛸 때다. 김종심〈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