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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우암 송시열]당쟁으로 끝내 사약받아

입력 | 1997-12-13 08:15:00


조선사에 있어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17세기, 그 한복판엔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그가 벌였던 뜨거운 논쟁의 하나가 유명한 「예송(禮訟)논쟁」.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3년동안 입어야할 것인지, 1년만 입어야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당시엔 장자(맏아들)가 죽으면 어머니는 3년간 상복을 입어야했고 장자가 아닌 경우엔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법도였다. 문제는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는데서 시작됐다. 인조의 맏아들은 이미 세상을 뜬 소현세자였고 효종은 둘째였던 것이다. 남인계열은 3년을, 송시열의 서인계열은 1년을 주장했다. 이것은 효종을 적장자(본부인의 맏아들)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둘째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남인은 효종이 왕통을 이어받았으니 장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내세운 근거는 「의례」 상복편의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차장자(次長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내용. 반면 우암은 소현세자가 세상을 떴을 때 이미 3년상을 치렀으니 소현세자를 장자로 인정한 것이고 따라서 효종은 장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의례」 예외규정을 그 근거로 들었다. 여기서 서자는 첩의 아들뿐만 아니라 적장자 이외의 아들 모두를 지칭한다. 이 첫번째 논쟁에선 우암이 승리했다. 그러나 15년 뒤 문제가 또 터졌다. 이번엔 효종비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우암과 서인들은 9개월복을 주장,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남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1년복으로 뒤바뀌었고 패배한 우암은 유배의 길을 떠나야했다. 「예를 그르치고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의 의도는 「죄목」과 다르다. 예법을 적용함에 있어 「왕실은 특별하니까 일반 백성과 달라야 한다」는 남인에 맞서 「왕실이라도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왕권보다 신권(臣權)을 중시하고 성리학적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