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학술진흥재단 김종운 이사장과 곱추의 美영문학 대가 피어슨 ▼ 미국 영문학의 대가 노먼 피어슨. 그를 처음 알게된 것은 58년 미국 메인주 보든대학 유학시절. 작지만 알찬 명문대였다.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 다닌 대학이니만큼 호손에 매달려 볼 참이었다. 당장 호손 전집을 구했고 말미 해설에서 피어슨을 만났다. 예일대교수이자 호손 연구의 최고권위자였던 피어슨. 그의 글을 관통하는 핵심은 「문학과 사회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 보완적 관계」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했다. 그는 에즈라 파운드, 월러 스티븐스, 로버트 프로스트 등 20세기 영미시사를 이끌었던 시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문학성을 고양시켜준 탁월한 안목의 영문학자였다. 그야말로 모더니즘을 축으로 한 20세기 현대시사를 활짝 열어젖힌 인물이었다. 유학 시절 그러나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처음 만난 것은 한국에 돌아온 뒤였다. 69년 한국아메리카학회를 맡고 있으면서 그를 서울학회에 초청했다. 피어슨을 처음 보곤 깜짝 놀랐다. 그는 곱사등이, 신체장애인이었다. 곧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체적 조건이 그를 위대한 학자로 만든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의 강의가 큰 호소력을 지녔던 것은 아닌지」. 그는 위대한 학자 이전에 인도주의자였고 진정한 스승이었다. 모든걸 제쳐두고 제자의 일을 먼저 돌봐주었다. 그가 신체적 장애를 딛고 2차대전당시 5년동안 유럽에서 미국 방첩대(OSS)간부로 일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경외감 뿐이었다.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73년 훌훌 털어버리고 미국 예일대로 날아갔다. 그곳에서의 1년, 피어슨은 내 스승이 되어 문학과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우리는 종종 예일대 한복판의 뉴헤이븐 공동묘지를 함께 거닐었다. 그때마다 그는 한 빈 자리에 멈춰 『우리 부부가 돌아갈 곳』이라면서 사념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2년도 채 못된 75년말 그는 결국 그곳으로 돌아갔다. 함께 거닐고 사색하던, 왜소해 보일만큼 늘 겸손하고 관대하고 인간적이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정리〓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