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의 작품 중 직역(直譯)하면 「아름다운 그대를 여름날에 비길 수 있으랴」란 귀절이 있다. 「안개의 나라」 영국에야 통하지만 무덥고 불쾌한 여름 장마를 겪는 한국에서는 이해못할 표현이다. 「가을 하늘」이라면 모를까. 번역은 이처럼 단어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의 결정(結晶)인 언어는 어휘뿐만 아니라 구성과 운율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분위기를 낳는다. 뜻을 위주로 한 의역(意譯)이 옳다거나 원전의 구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직역론자들의 다툼은 번역이 그만큼 어려움을 증명해준다. 모로코의 어느 작가는 번역을 여자에 비유하면서 『충실하면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우면 충실하지 않다』고 표현했다. 문장의 「감칠맛」이나 글 속에 숨은 문화심리학적 배경까지 전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역자는 창작자 못지않게 고뇌할 수밖에 없다. 문학뿐만 아니다. 학술서적의 번역도 사회사상의 맥이나 학문적 전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 아무리 사전과 씨름해도 문화와 풍습, 역사가 밴 작품을 다른 언어로 완벽히 살려내기란 실상 불가능하다. 번역을 「반역(反譯)」이라 부르는 일본 사람도 있는 것은 어쩌면 번역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함축하는 것일 수 있다. 때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위력이 큰 것이 번역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된 성서를 유럽인들이 자국어로 번역하면서 시작된 활자혁명과 종교개혁의 돌풍이 중세의 암흑시대를 무너뜨리고 르네상스를 불러왔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룻밤 새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을 번역, 출판해내는 기민성을 보여주는 한국에서는 「번역」하면 「날치기」란 말부터 떠올리게 되고 말았다. 소설가로 데뷔하기까지 전문번역가로 1백50권의 영어작품을 번역했던 안정효씨는 「번역 테크닉」이란 저서를 통해 번역가가 대접을 못받게 된 풍토는 번역가 스스로 만들어냈음을 지적한다. 60년대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 여러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내놓으면서 전문 번역가가 부족하자 대학교수들에게 맡겼다. 역설적이지만 이때부터 번역의 타락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소수의 양심적인 번역가를 빼고는 원고료만 챙기고 번역은 조교나 대학원생에게 시켰다. 안씨는 『대학교수라는 신분과 명성을 가지고 매춘행위를 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대리번역의 폐습은 아직도 남아 학술용어가 책의 앞뒤에 각기 다른 말로 표현된 경우도 흔하다. 출판인에게도 책임은 있다. 한 중견 출판인은 『그동안 번역의 질보다 시간경쟁에 매달려 왔고 요즘에는 저작권료를 역자에게 줄 인세에서 뜯어내는 수도 있다』고 자성한다. 영세성만 탓할 수 없으며 출판에 뼈를 묻겠다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번역의 좋고 나쁨보다 얼마나 빨리 하느냐만 따진 출판계가 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대리번역」이란 진귀한 현상을 낳았고 이렇게 생겨난 저질 번역물은 다시 번역물 홀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최명옥교수(국문과)는 『외국 학술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업적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교육부의 시각이 고쳐져야 한다』고 말한다. 번역의 고충에 대해 교수사회가 공감해도 교수 채용시나 승진시 업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정책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들여 번역해도 평가받지 못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문화연구원 강돈구교수(철학과)는 『시간강사나 박사과정생들이 번역료 때문에 출판사가 골라준 팔릴 만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고 꼭 필요한 책은 번역할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통탄한다. 그는 『학술서적의 번역은 그 자체가 큰 공부』라면서 『번역료에 개의치 않고 전공분야의 서적을 2,3권 번역해보도록 제자들에게 충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구 학계의 최신 이론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받아들이면서 번역은 홀대하는 국내 분위기와 일본은 다르다. 일본 학문의 역사가 번역물로 이뤄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뛰어난 학술 번역서를 낸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 일본 대학의 전통이다. 도쿄대 인문사회계의 박사논문에 붙은 인용문헌목록을 보아도 영어 원서는 거의 없다. 학문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다. 인용할 가치가 있는 전공서적은 대부분 전공자들이 충실히 번역해 두었기에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원전을 볼 까닭이 없는 것이다. 실로 번역의 역사는 세계문명사 흐름과 일치한다. 기원전 2350년경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적지에서는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함께 적힌 진흙판이 발견됐다. 무력으로 수메르왕국을 멸망시켰으나 그들의 선진 학문과 행정체제를 탐냈던 아카드족이 수메르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단어장」이었다. 그뿐인가. 백제의 겸익(謙益)은 서기 526년 인도 유학을 마치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전을 가져와 한자로 번역했다. 표류한 네덜란드인에게서 배운 짧은 어학실력만으로 해부학 서적을 번역했던 일본의 개화파 지식인들, 일제하 지식인의 사명 하나로 용비어천가의 번역에 매달렸던 사학자 김성칠(金聖七). 번역은 통치자와 억압받는 자가 함께 이용했던 문화전파와 흡수의 방편이었다. 번역의 역할은 세계화 물결속에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이 늘어나도 마찬가지다. 효율적으로 학문을 전달하는데 자국어만큼 유용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원서 해독에 걸릴 5시간을 번역본을 통해 1시간으로 줄인다면 4시간동안은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가 배출한 2천8백51명의 역과(譯科)합격자들.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여진어에 능통했던 이들이 제대로 된 책을 한권씩만 번역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조헌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