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젊은이들에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필독서나 다름 없었다. 「친북인사」로 분류돼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의 소설이 선보였다. 「검은 당나귀」(대산출판사 펴냄). 소설은 60대 할머니인 「나」에게 낯선이름의부고 편지 한 통이 배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위해 작은 도시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십년 세월을 훌쩍 건너 뛴 유년시절의 기억들. 불구지만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클라라와 과거에 매달려 꿈속에서 살아가는 슈테파니 자매. 이들의 대화 속에서 나치시절, 인간임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 마을 사람들 저마다의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실타래처럼 뒤엉킨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조각난 각자의 삶을 완성시키려 애쓰다 결국 지쳐버린다. 「도시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저기 누워 천연덕스럽게 수십년 세월을 되새김질하고 있기」때문이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불쑥 등장하는 검은당나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김세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