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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미수 허목]여론정치 꽃피워

입력 | 1997-12-20 08:07:00


조선 전기에 사림은 여러 번 사화를 당하면서 부침을 거듭하지만 16세기부터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면서 대세로 자리잡고 정계의 주류가 되자 과거를 통해 사대부가 되는 것이 선비의 기본적인 처세가 되었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혈연적 요인보다 학문적 능력이 우선시되는 경향이었다. 퇴계(退溪)나 율곡(栗谷),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도 명문 출신은 아니었다. 선비들은 또 하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 산림의 길을 택하여 재야에서 몇십년씩 독서하며 학파의 영수가 되고 그 학파가 정파로 바뀌면서 붕당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들 산림은 학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국가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큰 구도에서 정치판을 읽으며 왕으로부터 세도(世道)를 위임받아 사림사회의 여론인 청의(淸議)를 공론화하여 붕당정치를 이끌어나갔다. 17세기 후반 붕당정치에 있어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은 남인정파의 핵심인물이었다. 소북계인 그의 가계는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몰락하자 남인에 편입된 근기남인(近畿南人)이다. 동인에서 퇴계학파의 남인과 갈라진 북인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계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계의 연합체로서, 비순수성리학적 학풍을 가지고 있었다. 허목은 화담학에 연원을 둔 가학(家學)과 외조부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은자적 처세의 영향으로 초야에 묻힌 채 성리학뿐만 아니라 도가 등 다양한 학문을 연마했다. 허목은 퇴계의 고제(高弟)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로부터 3년 정도 학문을 배움으로써 퇴계학맥에 학문의 연원을 대고 있지만 실제 그의 성장환경과 관심사는 영남학파와는 다른 독자성을 보였다. 허목은 1657년 효종의 부음을 받아 남들이 은퇴할 나이인 63세에 유일(遺逸·등용되지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유능한 사람)로 대접받아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벼슬)으로 정계에 나아갔다. 국가 비상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산림들이 정계에 참여하는 대세에 따른 것이다. 출사한 지 불과 2년 후인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服喪)기간을 놓고 각 붕당이 서로 이견을 제기하니 이것이 제1차 예송(禮訟)논쟁인 기해 예송이다. 예치(禮治)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예를 적용하는 기준이 정치 문제화한 것이다. 허목 등 남인은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에 반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다 패배하고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가 68세인 1662년 그의 근거지인 경기 연천으로 낙향하였다. 1674년 제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에서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에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 승리하여 정국이 반전되고 남인정권이 성립되자 허목은 삼조석덕지사(三朝碩德之士·효종 현종 숙종 등 세 왕에 봉사한 큰 선비)로 칭송되며 대사헌에 특배되었다. 숙종이 남인의 왕권강화 노선을 인정하자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그는 왕권을 강화해 왕을 구심점으로 하는 강력한 정부를 지향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허목이 예송에서 소신을 갖고 주장한 학문적 근거는 고례(古禮)인 「의례」에 있었다. 우암을 대표주자로 한 서인이 퇴계 율곡단계에서 토착화한 조성성리학을 시대 사상으로 만들어 조선후기 통치이념을 도출하였다면 남인정파의 이론가 허목은 시대 과제를 해결하는 준거틀을 원시유학인 육경학(六經學)에서 찾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복고적인 고학풍(古學風)은 서경덕의 학문으로 소급되는 소북계의 학풍에서 잉태한 것이다. 따라서 예론 역시 고례인 「의례」에 입각했던 것이다. 그는 역사 인식에서도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 그의 역사책인 「동사(東事)」는 책이름에서부터 특이하다. 「사(史)」자 대신 「사(事)」자를 쓰고 있다. 그가 스스로 편집한 저서 「기언(記言)」 역시 육경에 근본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공자의 「논어」에 비견하여 책이름을 지었다. 「동사」는 「기언」 중에 편입돼 있다. 당시 역사서들이 성리학적 역사서술 방식인 강목체(綱目體)를 채택하고 있는데 반해 「동사」는 기전체(紀傳體)로 서술되어 있다. 허목은 여기에서 우리나라를 방외별국(方外別國)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중국과는 다른 또다른 독립된 천하질서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허목은 1674년 남인이 집권한 후 동종(同宗)의 허적(許積)이 정치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그를 비판하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허적 등 탁남(濁南)의 파행적인 정치행태에 대하여 꼿꼿한 선비 기질을 발휘, 도덕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남인 정권내의 강경파로서, 맑음의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처신으로 말미암아 1680년 경신환국으로 실권하여 남인정객이 대부분 숙청되는 상황에서 반대 정파인 서인조차 그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의 명분론적 입장과 고결한 인품을 인정한 것이며 그 덕분에 고향으로 방출된 상태에서 1682년 88세의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허목은 17세기 붕당정치 시대에 남인정파의 핵심인물로 부상하기까지 60여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한 대표적인 산림이었다. 환갑을 넘은 나이로 출사하였지만 우의정에 까지 승진하였다. 그의 원시유학에 대한 관심과 육경학연구는 그 이후 근기남인이 실학사상을 형성하는데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18세기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허목을 사숙하여 근기남인 실학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초상화에서 확인되듯 허목은 청수하고 개결하여 탁한 일은 용납하지 못하는 선비의 전형이었다. 정옥자(서울대교수·한국사) ▼ 약력 ▼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 박사학위 △저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역사에세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