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살림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그냥 땜질이 아니라 대수술을 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합의 때문에 어차피 2월 국회에서 예산을 다시 짜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이 기회에 예산 구조를 제로 베이스에서 재편할 필요가 있다. 4조원 이상의 감액을 하게 돼 있지만 덜 급한 부문에서 그 이상 깎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제조업 회생, 중소기업 육성, 수출 증대, 실업 최소화, 새 일자리 만들기 등을 위해 더 써야 한다. 새해 예산은 작년 여름에 대충 편성됐다. 그리고 지역 선심 등을 끼워넣어 지난해 11월 18일 확정됐다. 국회가 예산안을 통과시키던 시점, 우리 경제는 국가부도 위기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정부도 국회도 ‘경제 전시(戰時) 예산’을 짜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몇년, 몇십년 해온대로 이 항목 조금 늘리고 저 항목 조금 줄이는 식으로 짜맞춘 전형적 평시 예산이다. 새해가 마이너스 성장의 해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실업자가 백만 단위로 늘지 모른다는 불안도 없이 긴축 흉내를 내다가 만 예산이다. 우리는 전쟁중이다. 산업 붕괴와의 전쟁, 대량 해고와의 전쟁, 국제수지 적자와의 전쟁…. 국가부도와의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땅히 전황(戰況)을 호전시키는데 필요한 예산을 짜야 한다. ‘경제의 생명’에 지장이 없는 예산은 대폭 잘라야 한다. 그 ‘실탄’을 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 고용안정 프로그램을 위해 써야 한다. 간척사업에 올해 몇천억원을 넣지 않는다고 경제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지는 않는다. 경지 정리와 배수시설 개선을 조금 미룬다고 당장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농가 유리온실 시설비의 50%를 꼭 지금 보조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물류비를 줄이기 위한 도로 항만 등의 건설은 필요하지만 덜 급한 선심성 도로포장 어항정비 등도 적지 않다. 짓고 있거나 지을 예정인 크고 작은 공공건물 가운데 상당수는 당장 짓지 않아도 된다. 그걸 올해 짓지 않는다고 그쪽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일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국민 세금을 쓰는 숱한 정부출연기관과 공공단체 가운데는 사각지대가 수두룩하다. 민간부문만큼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면에 나서서 책임을 지지도 않는 관변 연구소 등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앙 및 지방 정부부터 군살을 도려내야 한다. 전국 군지역의 경우 20∼30년 전에 비해 인구는 절반 이하로 줄었는데 공무원 수는 2, 3배로 늘었다. 그 인건비를 줄여 산업부문에 효과적으로 넣으면 감축되는 공무원 수보다 훨씬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또 어음보험제도를 제대로 운용하면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어음도 보다 쉽게 할인될 것이다. 그러면 연쇄부도를 줄일 수 있다. 새해 예산에 어음보험기금 용도로 배정된 1천억원으로는 시범사업도 어렵다. 저소득층 밀집지역에 아파트형 공장을 많이 지어야 한다. 그러면 영세 중소업체들의 공장 입지난이 많이 풀리고 수출에도, 고용에도 도움이 된다. 저소득층 밀집지역에 아파트형 공장이 많으면 인근에서 고용된 종업원들은 교통비를 줄이고 탁아문제도 해결하기 쉽다. 경영자측은 임금을 적게 주어도 고용안정을 꾀하기 쉽다. 싱가포르가 서민아파트 단지에 공장동(棟)을 반드시 짓도록 하는 것도 그래서다. 예산이야말로 경제논리에 따라야 한다. 배인준(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