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맑고 산 깊은 충북 옥천. 유복한 가정의 2남 중 귀염둥이 막내였던 김세진(23·삼성화재). 그의 꿈은 소박했다. 배구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해 고향의 학교에서 체육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꿈이 그리 크지 않아서였을까. 옥천 삼양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배구공을 만지기 시작한 그는 옥천중, 옥천공고를 거치면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키도 1m80대에 머물러 공격수는 엄두도 못내고 주로 공을 배급하는 세터로 뛰었다. 고교 졸업을 앞둔 91년.‘스카우트의 귀재’로 불리는 한양대 송만덕감독의 입학권유를 받았다. 정말 고마웠다. 명문팀에서 불러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통통한 얼굴의 송감독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다정해보였다. 한양대 진학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송감독이 살짝 그를 불렀다. “너 이제부터 왼손잡이가 돼 보지 않을래.” “네?” “우리팀에 쓸만한 라이트 공격수가 없거든. 너라면 할 수 있을거야.” 그저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이웃집 아저씨’에서 ‘저승사자’로 변해 버린 송감독의 호통소리를 들으며 정말 심하게 코트를 굴렀다. 팀훈련이 끝나고도 매일 체육관에서 왼손으로 수백개의 스파이크를 때려야 했다. 밥먹을 때나 글을 쓸 때도 왼손만을 사용해야 했다. 몇개월 지나자 왼손에 감이 왔다. 라이트로 뛰면서 강타를 터뜨리기 시작하자 갈채가 쏟아졌다. 운도 따랐다. 자신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쑥쑥 크더니 대학 2학년 들어서는 키가 13㎝나 자랐다. 졸업반 때에는 어느새 2m의 거한이 돼 있었다. 단숨에 대학 최고의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94월드리그 공격왕. 95년 협회선정 최우수선수.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96년 삼성화재 입단. 무릎 수술을 받는 바람에 잠깐 공백이 있었지만 삼성화재가 창단 첫해에 슈퍼리그 정상을 밟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우며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그는 세계최고의 오른쪽 공격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냥 찾아온 것은 아니란다. “요즘은 변해야 산다잖아요.” 〈권순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