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려진 김종태의 ‘잠자는 소년’. 그림은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정책으로부터 무풍지대로 느껴지는, 그런 삶의 어떤 처마 밑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한가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은 일제 강점기 중일전쟁의 화염이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던 그 강퍅한 시절에, 무심하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한 어느 예술가의영혼을보여준다. 전쟁의 어둡고 긴 터널에갇힌역사와사회의 격랑에서 비켜선, 한 지식인의 초상. ‘조―울―고 있는…’. 〈전시(전시)에도 전시임을 느끼지 못하고, 사랑방에서 뜬소문으로만 전쟁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소한 일상은 마치 누룩과도 같아서, 진부하면 진부할수록 삶의 활력소를 더해준다. 흐르는 물의 가장자리 후미진 구석에 군데군데 자리잡은, 흐르지 않는 물웅덩이. 그곳이 바로 이들의 안식처다〉 미술평론가 강성원씨(43)의 ‘그림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계절 펴냄). 한국 근현대 미술이 어떤 정서와 과정을 통해 그 흐름을 엮어왔는지, 화가의 정신이 어떻게 작품에 투영돼 왔는지를 포괄적으로 다뤘다. 미술평론가들은 그림을 보기보다는 ‘읽는데’ 익숙하다던가. 강씨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침묵의 언어 속에 갇힌 화폭에서 시대의 정신과 작가의 내면세계를 짚어낸다. 1백년의 나이를 헤아리는 한국 근현대 미술.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개인화집이나 도록(圖錄), 전시회를 위한 책자의 서문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단편적인 연대기 또는 작가론 수준에 머물러 왔다. 이 책은 미술사적, 사회심리학적, 문화론적 측면에서 새로운 독법(讀法)을 시도한다. 한국미술문화의 실체를 규명하고 한국 근현대 미술의 골격을 새롭게 다져나가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한국 근대화단의 천재로 알려져 온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1935). 저자는 이 작품에서 식민지 문화정책의 본질을 읽어낸다. 언뜻 고갱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그림은 당시 한국 미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서 일제가 ‘천거한’ 서정적 향토성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복고풍의 보수적 성향을 미학화한 그림은 제삼제국의 미술(히틀러 시대의 미술)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에 대해 ‘불령(不逞)하지 않은’ 정형(定型)을 제시하고 이를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했던 일제의 통치구도를 드러낸다. 〈우리 농촌과 강산의 풍토를 ‘그림’처럼 보려했던 이인성은 농촌을 미화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가로운 원주민처럼 묘사했다. 사람의 삶을 삶 그 자체로 보지않고 단지 그림의 소재로만 파악했다〉 저자가 그림에서 ‘정치적 풍경’과 그 의미만을좇는것은아니다. 그는 서양 미술사조나일본화단의 ‘때’를타지않은 임군홍의 ‘나부’(1936)에서 새로운예술의 형식, 누드화의새로운스타일을 탐구한다. 누드 모델이 겪어왔을 삶의 온갖 흔적들이 씻기지 않은 채 묻어 있는 임군홍의 나부. 저자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줄곧 ‘벗은 인형’으로만 존재해온 누드의 전형이 깨지는 순간과 마주친다. 〈화가는 나부를 예술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기에 앞서 구체적 인간으로, 영혼의 동요에 짓눌리고 덧없이 살아 있는 무거운 육신으로 보고 있다〉 특히 조양규의 ‘창고―31’(1956)에 대한 작품 해석은 면도날로 베어내듯,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미지의 상징체계를 풀어낸다. 납작 눌린 오징어처럼 실존의 무게에 깔린 노동자의 여위고 지친 모습. 저자는 여기서 깊은 어둠 속에 내팽개쳐진 상처난 짐승의 무기력과 허기를 느낀다. 그에게 삶은 더 이상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단지 외로움의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민예총 등 민중미술단체에 오래 몸담아 온 저자. 그러나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대한 평가는 엄격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민중을 위한 예술의지로 충만했을 뿐 민중의 예술로서 사랑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90년대 들어 민중미술운동은 작품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운동에 대한 기억만이 역사로 남았다’고 진단한다. 그래선가. 저자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판화가 오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민중정서의 예술적 승화에 이르렀다는 오윤. 그의 대표작 ‘칼노래’는 우리 산자락처럼 깊고 유연한, 혹은 절박하게 내리지르는 듯한 칼맛의 흐름을 통해 끊어질 듯 이어지고 힘을 모으다 내뱉는 우리 춤맛을 그대로 살려 내고 있다고 말한다. 집필과정에서 ‘사람 사는 동네’의 입김과 관계, 그 어쩔 수 없는 ‘기울어짐’을 가장 경계했다는 저자. 화단정치에 담을 쌓고 살아온 화가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에게 남다른 애정이 쏠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라고 한다. 어느 미술사가는 저자의 책을 이렇게 평한다. “마치 잘 짜여진 이미지의 박물관을 둘러보는 느낌이다. 소장된 작품들은 혹은 서로 밀어내며, 혹은 서로 끌어당기며 한세기에 걸친 우리 근현대미술을 전혀 새로운 의미의 지평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