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치동 영동5교 아래엔 폐품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터가 있다. ‘넝마주의 공동체’또는 ‘자원재활용연구소’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꾸려가고 있는 ‘넝마 대장’ 윤팔병(尹八炳·58)씨는 강남 주부들이 내다버린 헌옷 40여만 벌 중 1만여 벌을 골라 먼지를 털거나 빨아서 지난해 북한돕기단체에 기증했다. 중고 철근과 폐지 따위를 주워 팔면서 번 돈 2천만원도 북한 돕기에 썼다. 그는 먹을 것 외엔 돈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아내(48)에게도 남이 입던 헌옷만을 입게 했다. 그러나 굶주리는 북한사람을 돕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말 2천만원을 선뜻 기증하고나서는 아내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며 장미 일곱 송이를 선물하기는 했다. 하루 종일 폐품과 헌옷을 수집하고 골라 새것처럼 만드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피곤이 밀려와 요즘엔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아내와 큰아들 사비군(서울예전 사진학2)은 틈만 나면 자원재활용연구소에 와서 폐품 중에 쓸만한 것을 고른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우리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살겠다”고 사비군과 동생 하민군(언주중2)은 말한다. 윤씨는 전남 함평군에서 포목상을 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큰형은 일병, 둘째형은 이병…. 위로 여섯 형제는 6.25때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거나 실종했다. 일곱째형은 고문후유증으로 ‘어머니를 따라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막내는 전북 변산에서 대안학교 운동을 벌이고 있는 윤구병전충북대교수. 그는 초등학교 3년을 끝으로 거리를 헤맸다. 구두닦이 지게꾼 찐빵장사 권투선수 등 거의 모든 밑바닥 삶을 거쳤다. 윤씨는 부산에서 노점상연합과 거지합숙소의 ‘대장’이 되면서 ‘더불어 사는 것’에 눈을 떴다. 거지합숙소에는 ‘교양교실’을 열어 거지들에게 한글과 역사 일본어 등을 가르쳤다. 75년엔 동생의 전세보증금을 몰래 빼돌려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하숙집 주인 딸을 서울로 데리고 와 결혼했다. 서울에서는 넝마주이와 헌책방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70년대 중반 강남에서 ‘부동산 바람’이 불어 1년에 몇 번씩 이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이 버린 폐품과 헌책을 팔면서 1년에 1백만원 이상의 ‘떼돈’을 벌었다. 아내는 미장원을 꾸려나갔다. 86년엔 20여명의 넝마주이를 모아 ‘자원재활용연구소’를 차렸다. 이 일을 위해 21평형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옮겼다. 88년엔 경기 과천시 중앙동에 헌옷가게 ‘작은 세상’을 열었다. 지난해엔 서울 사당동에도‘작은 세상’을펼쳤다. 강남에서 수거한 옷들 중에 아직 쓸만한 것들을 판다. 프랑스제 숙녀화, 독일제 모피코트 등 쏠쏠한 것들이 많다. 외국인 노동자와 저소득층 주부 등에겐 무료로 옷을 주기도 한다. 그는 외국에서 볼 수 있는 ‘상설벼룩시장’을 여는 것이 꿈이다. 윤씨는 “자신만을 위해 흥청망청하던 사람들도 국제통화기금(IMF)한파 속에서는 더불어 사는데 눈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한마디했다. 〈이성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