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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배인준/재벌과 권력

입력 | 1998-01-14 20:07:00


‘문민정부 기간에 가장 득을 본 재벌은 현대그룹이다.’ 경제 현장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풀이는 이렇다. ‘현대그룹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미움을 받아 오랫동안 자금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고 싶은 사업 진출도 발목잡혔다. 경쟁 그룹들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일부 타그룹은 욕심껏 돈을 끌어대 과잉 과오투자를 했다가 부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반면 현대는 기회가 적어 부실도 적었다.’ 92년 대선 때 정주영(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김영삼후보의 정적(政敵)이 된 것이 결과적으론 불행중 다행이었다는 역설이다.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은 13일 4대 그룹 회장들과 만났다. 간담 후 박지원(朴智元)대변인은 이렇게 밝혔다. “김차기대통령은 모(某)기업 회장에게 요즘 악성 루머에 시달린다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으니 진짜 모범을 보여 잘해 달라고 당부했다.” ‘모 회장’은 이건희(李健熙)삼성회장을 지칭한다. 악성 루머란 ‘김차기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인 삼성이 새 정부 임기 동안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 삼성측은 반색을 했다. 오죽하면 ‘김차기대통령이 삼성 관련 루머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두번이나 강조했다’는 보도자료까지 냈을까. 김차기대통령의 의욕적인 경제 나들이는 나라 안팎에서 대체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문제를 안고 있는 경제주체들을 몸을 아끼지 않고 만나 급박한 경제 위기상황을 풀려고 애쓰는 모습은 국민에게 적잖은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삼성그룹 루머해명 해프닝엔 입맛이 쓰다. 권력에 잘못 보이면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인식이 기업과 국민 일반에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뒤집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같이 인식하는 것이 현실임을 김차기대통령측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날의 회동에 앞서 김차기대통령이 외국에 나가 있는 김우중(金宇中)대우회장에 대해 ‘해외 활동에 전념하라’는 뜻을 밝혔다는 대목도 어색하다. 김회장이 마침 외국 체재중에 김차기대통령의 5대그룹 회장 회동계획을 듣고 참석 여부를 고민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배려로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런 배려 자체가 권력과 기업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중요한 본업 때문에 회동에 불참하는 일이 어떤 양해 절차 없이도 자연스럽게 가능한 분위기가 아직은 아님을 드러낸 셈이다. 전두환(全斗煥)씨가 대통령일 때 청와대의 부름에 지각한 양정모(梁正模)국제회장이 ‘괘씸죄’에 걸려 그룹 붕괴의 날벼락을 맞았다는 얘기가 항간에 나돈 적이 있다. ‘아무려면 그럴 리가…’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같은 인식에는 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차기대통령은 지난해 12월19일 당선 기자회견에서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재벌 총수들은 김차기대통령의 회동 요청을 받고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김차기대통령의 책임일 수는 없다. 다만 이들 기업인이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읽을 수는 있다. 이같은 구태(舊態) 정경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역시 김차기대통령의 행동과 실천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김차기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구태를 되풀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재벌개혁도, 정리해고도 인치(人治)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대한 합목적적이고 정합성(整合性) 있는 법 제도, 즉 시스템을 구축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권력의 힘이나 편의적 행정지도에 의존하는 개혁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과거 군사정권들도 한결같이 그랬지만 김영삼정부 초기에 요란했던 재벌개혁이 실패한 원인의 하나도 그것이었다. 배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