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우법」 (박희병 편역 창작과비평사 펴냄) 삶과 배움이 어찌 별개일 수 있으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공부의 과정이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도야(陶冶)하면서, 세상을 밝히고 인간과 우주의 도(道)를 깨쳐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이 아니던가. 우리 선인들은 지식을 죽은 지식으로 보지 않았다. 윤리적 주체와 지식을 분리하지 않았다. 주체는 지식 속에 내면화되고 지식은 주체의 한 역동적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동아시아 학문론이 안과 밖, 몸과 마음을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천지만물과 몸―마음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그래서 체득(體得), 곧 몸으로 깨닫는 것이 중시된다. 몸으로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게 뭔가. 그저 지식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윤리적 주체를 통합함을 이른다. 이것이 이른바 공부의 활법(活法)이다.’ 서울대 박희병교수(국학)의 ‘선인들의 공부법(창작과비평사 펴냄)’.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사람 가운데 공부에 있어 ‘크고’ 훌륭한 성취를 보여준 이들의 글을 모았다. 선인들의 글은 일상생활의 언행은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독서 방법, 마음을 다스리고 어떻게 몸가짐을 해야 하며 어찌 벗을 사귀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들이 공부의 과정 속에 한데 어우러짐을 보여준다. 조선조 추사 김정희의 글을 보자. ‘난을 치는 것이 비록 소도(小道)이기는 하나 법도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거늘, 하물며 이보다 큰 일에 있어서랴. 이 때문에 한 잎, 한 꽃봉오리라도 자신을 속일 수 없고 남을 속일 수도 없다.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키니, 그 얼마나 무서운가….’ 학문론에 있어서나 예술론에 있어서나, 주체인 ‘나’의 뜻과 정신의 경지를 중시했던 추사. 그런 그였기에 글쓰기가 됐든 난을 치는 일이 됐든 자기자신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학문의 준칙으로 삼아 온 추사. 그는 선비들이 경서의 고증이나 주해, 해석에 얽매이는 현실을 이렇게 질타했다. ‘성현의 도는 비유컨대 커다란 저택과 같아서, 주인이 늘 거처하는 사랑방은 문간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간에 해당하는 것이 훈고이다. 일생 동안 문간에서만 분주히 오가고 대청에 오르거나 사랑방에 들어가려 하지 않으니 그들은 하인배와 뭐가 다른가.’ 조선조 동시대를 살았던 퇴계 이황과 화담 서경덕, 그리고 남명 조식. 이들이 남긴 글은 공부가 삶 그 자체이며 학문하는 자세가 곧 사람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향리에 파묻혀 학문에만 전념해 온 퇴계. 그는 주자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의 글에서는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처사(處士)의 변이 느껴진다. ‘일찍부터 괴이하게 생각한 것은 우리나라 선비로서 조금 뜻이 있고 도의를 사모한 사람은 대개 화를 당했다는 사실이다.…이는 학문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너무 높게 자처했으며,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용감하게 세상을 경륜하고자 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스승 없이 혼자서 고심하여 학문을 깨친 화담. 그는 사색을 통한 용맹정진과 ‘자득(自得)’을 학문의 요체로 봤다. 그의 글은 기철학자다운 명상과 달관, 관조의 경지를 엿보게 한다. ‘그 옛날 책 읽을 땐 세상에 뜻을 두었지만/나이 드니 도리어 안회(顔回)의 가난함이 즐겁네./부귀에는 다툼이 있으니 손대기 어렵지만/자연은 막는 이 없어 편히 쉴 만하네.’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힘써 독자적인 학풍을 연 남명. 그는 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선비였다. 그의 글은 아는 것은 마땅히 실천해야 한다는 의기(義氣)가 배어난다. ‘큰 도시의 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 그러나 하루종일 길거리를 오가며 그 값을 물어본다 한들 끝내 자기 집 물건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베 한 필로써 한 마리 생선을 사서 돌아옴만 못할 것이다.’ 조선후기 영정조시대는 실학이 전개되던 시기.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학문이 기운을 얻었다. 성호학파의 창시자로 실학의 디딤돌이 된 이익. 그의 글은 종전의 성리학자들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양심적인 반성과 뼈저린 자각이 생생히 묻어난다. ‘나는 천성이 글을 좋아한다. 그러나 종일토록 고심하여 글을 읽어도 실오라기 하나, 곡식 한 톨도 내 힘으로 생산하지 못하니, 어찌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가 아니겠는가….’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