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으로 전신이 마비된 환자가 병상에서 쓴 에세이가 얼마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은 프랑스 여성전문지 엘르 편집장을 지낸 장 도미니크 보비. 그는 침상옆의 대필자가 알파벳을 가리키면 눈을 깜박거려 ‘예’ ‘아니오’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책 한권을 펴냈다. 그가 책을 쓰기 위해 눈을 깜박거린 횟수는 20여만번. 당시 외신은 인간승리의 이 스토리를 전하면서 ‘디지털의 승리’라고 흥분했다. 눈깜박임과 디지털.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알쏭달쏭한 것이 디지털의 인식체계가 아닌가 싶다. 필수품이 되어버린 컴퓨터와 각종 멀티미디어 정보기기, 광속의 초고속 통신망.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거대한 정보네트워크 ‘인터넷’, 지구 밖 8천만㎞ 화성에서 4,5분만에 날아오는 우주탐사선 패스 파인더의 전송사진. 이런 디지털 문명을 탄생시킨 첨단 전자기술의 핵심이 바로 반도체 칩. 올해가 칩 발명 50년 되는 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해 12월 ‘올해의 인물’에 앤드루 그로브 인텔회장(62)을 뽑았다. 인텔은 전세계 PC에 공급되는 마이크로 칩의 90%를 장악한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 타임이 밝힌 선정 이유는 “마이크로 칩의 혁신을 통해 디지털 혁명을 선도하며 세계를 바꿔 놓고 있다”는 것이 골자. 굳이 타임의 설명을 빌리지 않아도 비즈니스 현장에선 지금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상식이 깨지고 제품의 개념 자체가 송두리째 변화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상거래 관행이 컴퓨터로 대체되고 디스켓 한장이면 사진도 자유자재다. 영화의 특수효과는 디지털의 결정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시간속으로 사라져 버린 공룡을 디지털 기술로 부활시킨 ‘쥬라기 공원’으로 떼돈을 거머쥐었다. 디지털 기법 때문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합성한 ‘실리우드’란 말까지 생겼다. 남보다 앞서면 기회를 잡지만 한번 낙오하면 영원히 따라잡기 힘든 곳이 디지털 즉 정보화의 승부다. 미국의 대표적인 유통업체 월마트 와 시어스 로벅의 기업경쟁은 성공과 쇠퇴의 양단을 극명히 보여준다. 87∼92년 사이 월마트가 정보화에 투자한 돈은 총 6억달러. 그것도 경제가 불황일 때 정보화쪽에 투자를 집중했다. 시어스 로벅이 매상고에만 매달려 있는 동안 월마트는 10억달러의 비용절감에다 시어스의 3배가 넘는 연평균 30.6%의 매출신장을 기록했다. 시어스는 결국 사업리듬을 잃고 장래가 불투명한 상태에 빠져 있다. 일본을 완전히 제친 미국 경제의 강점도 그 배경은 정보화다. 80∼90년대 초반 미국과 일본은 정반대의 전략을 선택했다. 불황에 대한 대응에서 일본이 정보화 투자를 감축한 반면 미국은 성장률보다 훨씬 높은 정보통신부문 투자로 경제를 바닥까지 개혁했다. 그 결과 미국은 일본에 뺏겼던 세계1위의 경쟁력을 회복했다. 월마트와 시어스 로벅, 미국과 일본간 대응의 차이는 김대중정부의 경제좌표 설정과 최근의 경제위기를 타개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우선 배워야 할 한가지. 미국도 불황기에 근로자를 무자비하게 정리했지만 사무혁신 문서전산화 등 정보화로 공백을 메웠다. 우리 기업이 무조건 종업원을 대량 해고해 놓고 동시에 정보부문 투자비까지 잘라버리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가 된다. 고용창출에서도 주목할 부분이 있다. 미국의 경우 하이테크 산업의 고용력이 총 1백60만명(96년기준)으로 섬유1백50만, 자동차1백40만, 화학부문 1백만명에 비해 월등하다. 고용불안과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우리 경제에 정보화와 디지털 벤처 비즈니스는 활로가 되면서 낡은 체질의 정치와 행정개혁, 시장경제의 완성에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아닐까. 이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