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18일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의 ‘국민과의 TV 대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5년전 일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후보를 괴롭힌 ‘난제(難題)’중의 하나는 바로 TV토론이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선거 3개월 전인 9월부터 민자 민주 국민 3당 후보의 TV 합동토론회를 요구했다. 김영삼후보의 민자당은 고민에 빠졌다. 김후보 자신은 언론사 인터뷰나 관훈토론회에서 “지금은 텔레비전 정치시대”라며 “여건만 갖춰지면 당당하게 TV토론에 응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김후보의 선거캠프는 그렇지 않았다. ▼저사람 당선땐 나라 망한다▼ 선거캠프는 김후보의 토론 능력을 우려했다. 그것은 이미 민자당 경선 때부터 거론돼온 문제였다. 당시 ‘반(反)YS(김영삼)진영’의 박태준(朴泰俊·현 자민련총재)최고위원은 심지어 “저렇게 말귀를 못알아 듣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비난했다. 아닌게 아니라 YS는 당시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던 ‘우루과이 라운드’를 ‘우루과이 사태’라고 말하는 등 상당히 심각한 ‘실수’들을 자주 노출시켜온 터였다. 선거캠프 내에서는 특히 민주당 김대중후보, 국민당 정주영(鄭周永)후보의 ‘경제 공세’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의가 심각하게 제기됐다. 한이헌(韓利憲·전 청와대 경제수석)씨에 이어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의 박재윤(朴在潤·전 재무장관)씨가 ‘과외교사’로 동원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TV토론에 대비한 김후보의 ‘벼락치기 경제과외’는 당시 김후보의 차남 현철(賢哲)씨가 운영하던 ‘광화문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당시 ‘과외’를 지켜본 민주계 인사의 증언. “TV토론이라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벼락과외’가 시작됐으나 YS는 네번인가 다섯번인가 참석하고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강의를 회피했습니다.” 민자당은 결국 TV토론을 거부했다. “3당후보 뿐만 아니라 후보로 등록한 8명의 군소후보가 모두 토론에 참여해야 기회균등의 원칙에 맞는다”는 것을 반대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YS에 대한 ‘과외’는 훨씬 이전부터 시도됐다. 김대통령 취임에 대비해 문민개혁 프로그램을 준비한 이른바 ‘동숭동팀’의 전병민(田炳旼·조각 당시 청와대정책수석 내정자)씨는 3당합당 직후 YS캠프에 합류하자마자 극비리에 특별팀을 만들었다. 90년 3월 무렵이었다. 민주화 투쟁하느라 국가지도자로서의 ‘지식과 교양’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YS를 위해 ‘교양서적 다이제스트’를 만들어 제공하자는 계획이었다. ‘동숭동팀’실무자가 최초로 공개하는 당시 상황. “전씨는 문민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동숭동팀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제1기 동숭동팀’에 2명의 다이제스트 인력을 고용했습니다. 60년대 일본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의 얘기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독서광으로 소문난 사토가 총리가 된 이후 업무에 쫓겨 책읽을 시간을 갖지 못하자 ‘다이제스트 담당비서’를 두고 읽고 싶은 책을 요약토록 했다는 얘기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당시 ‘동숭동팀’ 실무자의 회고. “전씨는 다이제스트 요원들에게 ‘쉽고 눈에 빨리 들어오도록 핵심을 잡아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물론 문장력은 기본이었습니다. 전씨는 당시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청와대에서 만든 ‘중국사 요약본’을 ‘악례(惡例)’로 인용하며 요약문을 ‘신문 사회면’ 수준으로 정리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중국사 요약본’은 무려 1백쪽이나 될 뿐만 아니라 내용도 지나치게 어렵게 정리돼 있었습니다.” 전씨는 ‘다이제스트 요원’들에게 책의 내용을 ‘신문 사회면’ 수준으로 요약하는 훈련과정을 거쳐 일주일에 책 한권씩을 요약토록 했다. 책은 전씨가 일요일 오후 교보문고에 가서 직접 골랐고, 더러는 YS가 주문한 것도 있었다. 김대통령 취임 이후 ‘제왕학’의 교과서처럼 회자돼온‘정관정요(貞觀政要)’,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의 회고록은 YS가 직접 요약해달라고 부탁한 책이었다. ‘동숭동팀’ 실무자의 기억. “당시 민자당 내에는 YS에게 ‘2인자 다운 자세’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레이건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부시는 부통령도 백악관 앞뜰에서 헬기를 탈 수 있었지만 2인자로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일부러 헬기장까지 걸어가서 헬기를 탔다며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측은 YS에게 은근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런 얘기 때문이었는지 YS는 어느날 부시회고록을 요약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YS용 다이제스트 판’은 당선 때까지 대략 2백50권에서 3백권 정도가 쌓였다. 책 한권을 요약한 분량은 A4용지로 20∼25쪽 정도였고 길어도 30쪽을 넘지 않았다. 로마패망사나 중국사처럼 내용이 긴 책은 상중하로 요약했다. 활자도 YS를 위해 굵은 것으로 했다. 뿐만 아니라 요약본의 맨 앞에는 ‘이 책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한두 쪽 짜리 요약을 또 넣었고, 필자 소개, 그리고 어떤 경우의 국정운영에 참고할 수 있는지를 주석으로 달았다. 92년 5월 YS가 민자당후보가 된 이후에는 일주일에 두 권씩 요약됐다. 한 권은 당선된 뒤 청와대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비축용이었다. 그만큼 YS가 취임 후에 부닥칠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얘기였을까.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동숭동팀’ 실무자의 기억. “그 무렵엔 리더십 개념도 과거의 ‘국가 통치’ 개념에서 ‘국가 경영’ 개념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김영삼후보의 과거 경력을 보면 오로지 민주화투쟁에만 전념해 국가경영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나 경험축적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김후보가 9선 의원이라고 하지만 과거 야당에는 정책경쟁도 없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당장 TV토론이라는 ‘산’은 넘겼지만 김후보가 당선후 국정최고책임자로서의 자질을 어떻게 다듬어 가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어떻게 합니까. 다급하지만 그동안 했던 ‘교양학습’의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요예배 본뒤 자택서 읽어▼ 상도동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YS 자신도 ‘동숭동팀’의 그런 보좌역할을 꽤 유익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상도동 가신’의 증언. “적어도 민자당 경선과정이 치열해지기 전까지는 YS도 요약본을 즐겨 읽었습니다. 주로 평소 다니던 충현교회에서 일요예배를 본 뒤 상도동 자택에서 읽었습니다.” 김대통령은 취임을 하루 앞둔 93년 2월24일에는 “전실장에게 전화해 그동안 만들어 준 요약본들을 다시 프린트해 보내달라고 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요약 목록’에는 각국 지도자의 전기와 회고록, 역사서, 중국 고전, 통일과 남북관계에 관한 연구서적, 리더십에 관한 저술들, 국내외 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각종 연구보고서, 그리고 일간지의 각종 장기연재 기사까지 망라됐다. 전기와 회고록만도 50여권.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일본의 호소카와 총리 등의 저서가 요약됐다. 앨빈 토플러, 존 나이스비트, 피터 드러커, 대니얼 벨, 폴 케네디, 로버트 B 라이시, 에즈라 보겔, 조셉 나이 등의 역사서적이나 미래학 서적 20여권도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이면우교수의 ‘W이론’, 산악인 허영호씨의 등반기도 들어 있었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일축▼ 특히 미국 메릴린치사(社) 수석부사장을 지내고 일본으로 귀국, 이즈모라는 조그만 시의 시장을 역임한 이와구니 데쓴도(岩國哲人)의 서적은 5, 6권이나 요약했다. 그는 ‘중앙정부 무용론’과 관료제 폐해를 역설해 화제를 모았다. ‘동숭동팀’은 그의 경영론이 문민개혁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YS의 ‘자질 향상’을 위한 ‘동숭동팀’의 그런 시도들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취임 초만 해도 ‘열린 태도’를 보이던 김대통령은 그러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국정에 대해 자신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독선으로 치달았다. 조언을 해도 “당신들이 뭘 안다고…”라는 말로 일축했다. ▼베일에 싸인 「동숭동요원」▼ ‘YS용 다이제스트’를 만든 2명의 ‘동숭동 요원’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한 사람은 고려대 국문과 출신으로 안기부에서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른바 ‘특상(特上)보고서’를 작성한 경험을 가진 인물. 또 한 사람은 경기고와 서울대 불문과 출신으로 시(詩)를 쓰던 문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작업의 구체적 사례 중 하나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전기물 요약을 보자. 요약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영국특파원이 쓴 ‘대처혁명, 영국은 소생할 것인가’의 한국어판과 프랑스신문의 영국특파원이 쓴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기초로 했다. “거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영국을 소생시킨 대처의 개혁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임….” 실제로 92년 당시 김영삼(金泳三)후보가 선거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한국병’은 당시 특보였던 이경재(李敬在)의원이 ‘영국병’에서 힌트를 얻어 작명한 것이다. 대처 총리 전기물의 다이제스트는 마지막 부분에서 ‘대처리즘’의 정책적 요점을 △예산삭감을 통한 ‘작은 정부’실현과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대중 자본주의’의 달성 △‘영국병’의 뿌리인 노조개혁 △방만한 중앙정부조직과 지방의 재정문제 타개를 위한 세제개혁과 기업의 경쟁력 강화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대처리즘’은 한마디로 강력한 리더십을 위한 ‘민주적 독재’라고 결론지었다. 김대통령이 내세웠던 구호들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적지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 YS가 읽은 교양도서 ▼ ◇전기 및 회고록〓‘작은 거인 등소평’ ‘회상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회고록’ ‘고백’(보리스 옐친) ‘권력과 인생’(지스카르 데스탱) ‘마거릿 대처’ 등 ◇경제분야〓‘우리 경제 어디로 가고 있나’(곽수일)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서상목) 등 ◇역사서〓‘현대인이 읽는 사기(史記)’ ‘청백리 열전(列傳)’ ‘제왕학’ ‘일본의 역사’(민두기) ‘미국사,(이주영) 등 ◇외교안보 관련서적〓‘독일통일의 해부’(이영기)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서대숙) 등 ◇기타〓‘우리가 일본에서 배울 것은’(에즈라 보겔) ‘군주론’(마키아벨리) ‘전예측(全豫測)―1990년대의 일본’ ‘전예측―1990년대의 아시아’ ‘전예측―1990년대의 세계’(이상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 ‘메가트렌드 2000’(존 나이스비트) ‘권력이동’(앨빈 토플러) ‘21세기 미국파워’(조셉 나이) ‘새로운 현실’(피터 드러커) ‘걸어서 땅끝까지’(허영호) ‘제3의 기술혁명’(대니얼 벨)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이장규) ‘대통령의 유머와 위트’(제럴드 가드너) ‘미국의 새 지평’(로버트 라이시)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김현희) ‘수뇌론’(엄가기) ‘강대국의 흥망’(폴 케네디)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로버트 P 올리버) ‘유러퀘이커’(대니얼 번스타인) ‘협상의 비결’(로저 피셔) ‘현지에서 본 프랑스교육’(신용석) ‘뉴리더의 조건’(워렌 베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