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 위기를 넘겼다고 안도하는 분위기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기를 과장해서도 안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위기 ‘불감증’과 ‘건망증’이다. 작년말의 외환위기는 간신히 넘겼지만 잠재적인 모라토리엄(외채 지불불능) 상황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민간채권은행단은 만기가 돌아오는 우리나라 단기외채의 상환을 3월말까지 연장해주기로 했다고 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지가 19일 보도했다. 그러나 악성 단기외채의 상환이 일단 3월말까지 유예된다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빚의 원리금이 어딘가로 사라지는가. 늘어날 뿐이다. 단기외채를 최대한 유리한 조건의 장기외채로 전환하지 않고는 숨을 돌리기 어렵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작년말보다 훨씬 심각한 외환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추가 해외차입도 필요하다. 그래서 김용환(金龍煥)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외환협상대표단이 18일 미국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21일 뉴욕에서 국제채권단과 악성 단기외채의 구조조정을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번 협상의 장기화 관측이 뉴욕 월가(街)의 뱅커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단기외채의 장기외채 전환 등 외채 구조조정을 둘러싼 우리측 협상단과 채권단간의 입장 차이 때문이다. 이자율 차입기간 조기상환옵션 등에서 이견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캐나다 이탈리아 등의 주요 채권은행들간에도 견해 차이가 있다. 우리측 협상단원인 유종근(柳鍾根) 차기대통령 경제고문도 현지에서 “우리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번 협상을 크게 기대해서는 안되며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외환위기 극복의 길은 더욱 험난해질 수밖에 없다. IMF 지원패키지에 참가하고 있는 미국 등은 이달초에 주겠다고 지난달 약속한 80억달러의 지원을 미루고 있다. 우리 정부와 국제채권단간의 협상결과를 본 뒤에 주겠다며 애를 태운다. IMF 지원패키지와 민간은행들의 채권관리를 연계해 이익을 챙기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만 무디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등 신용평가기관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올릴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우리측의 협상카드에 다소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이 투명한 내용으로 조기에 가시화하지 않으면 신용등급 올리기도, 악성의 외채구조를 개선하기도 어렵다. 빚 얻어 빚 갚는 방식이 아닌, 투자유치에 의한 위기 타개 역시 뜻대로 되기 어렵다. 외환위기 해소와 표리관계인 경제개혁의 핵심은 금융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이다. 이들 부문의 개혁이 말만 요란하고 실제로는 알맹이 없이 맴돌 경우 한국 회귀(回歸)조짐을 보이고 있는 달러가 다시 등을 돌릴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금융권은 방만한 경영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자성보다는 관치금융의희생양이라고 둘러대기 바쁘다. 또 재벌들이 은행을 망쳤다고 남의 탓하기 바쁘다. 재벌들은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과 만난 뒤 구조조정계획을 내놓기 시작했지만 개혁의지를 충분히 읽기 어렵다. 자기들이 원하는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해주면 총수 사재를 털어서라도 출자하겠다고 한 것이 엊그제인데 지금은 사재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노동계는 정리해고제 실시를 1년여 앞당기는데 대해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일부지역 노조연합체는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 총파업에 나설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런 가운데 외환위기에 대한 실감은 둔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개혁의 시급함과 절실함에 대한 인식도 약해지는 조짐이 나타난다. 경제위기 관리에 구멍이 뚫릴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배인준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