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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이익]특권층 구조조정외친 평등주의자

입력 | 1998-01-22 19:46:00


18세기엔 임진 병자 양란의 파괴와 혼란을 딛고 사회가 크게 발전했다. 농업 생산이 증가했고 이것이 상업 수공업 광업 등 경제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부유한 서민 천민들 가운데는 모속납속(冒屬納粟)의 방법과 같이 돈과 곡식으로 벼슬을 사거나 전공(戰功)을 세워 양반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층민의 이같은 신분상승으로 양반중심의 신분제도가 크게 동요했다. 또한 놀고 먹는 특권층은 많아졌고 이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농민들은 그만큼 세금 부담이 무거워지고 농사짓기도 힘들어졌다. 발전의 흐름 속에는 불안 요인도 있게 마련이었다. 상승계층의 욕구증대와 함께 농민 몰락계층의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이 무렵 정치변란이 적지 않았고 군도(群盜)가 출몰하며 유언비어가 횡행했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위정자들은 이렇다 할 대책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전심전력한 학자요 사상가였다. 그는 국가와 민생의 입장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당장 실행 가능한 대안을 찾으려 했다. 그의 과제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을 해소하여 농민생활을 안정시키는 일과 정치항쟁을 종식시키는 일로 집약되었다. 이익은 정전제(井田制)와 같은 토지공유방식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다. 일백 사람이 찬성해도 반대하는 한 사람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한 사람이란 바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권세가였다. 그래서 그는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했다. 한 집의 생계소유를 위한 최소규모의 토지를 영업전(永業田)이라 하고 규모에 미달하면 토지매입을 권장하되 초과하는 경우 매각은 가능하나 매입은 불허하는 방법이었다. 이 제도를 장기간 실시하면 모두 영업전이 확보되고 대토지소유자는 분할상속이나 몰락등으로 점차 사라짐으로써 균등한 토지 소유가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당쟁의 원인은 제한된 관직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에 있었다. 문제는 관직의 수가 적은 데 있지 않고 양반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양반의 수를 줄이고 특권도 제한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관직 진출의 통로를 좁히기 위해 과거시험횟수와 합격자수를 줄이자고 했다. 양반의 특권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양반의 생업활동 장려, 생업에 종사하는 선비의 관리임용, 여론과 평판에 의해 인재를 추천하는 공거제(貢擧制) 등을 제시했다. 양반신분과 그 특권이 없어지면 농민경제가 안정되고 당쟁도 따라서 사라질 일이었다. 그가 사농(士農)합일, 양천(良賤)합일을 주장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신분과 직업의 차별을 철폐하여 양반도 무위도식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해야 하며 노비의 신분세습을 점차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밖에도 부유층의 횡포방지와 빈민층 보호, 소수에 독점된 언로(言路)의 확대, 문무(文武)병용과 공정한 인사관리, 병농일치의 실현과 국방강화,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호혜관계유지 등 국가경영 전반에 걸친 개혁을 폭넓게 제시했다. 그런데 이익은 남녀칠세부동석을 강조함은 물론이고 여자가 화장한 얼굴을 남에게 보이는 것조차 부도덕한 일로 여겼다. 세끼 식사준비와 옷감짜기에 힘쓰는 것만이 여자의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개혁 사상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었다. 이익의 개혁론은 그 현실성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다. 토지의 사유를 전제로 하는 한전론이 그렇고 몰락하는 양반층을 겨냥한 양반생업론이 그렇다. 만약 그의 개혁안이 실현되었다면 조선은 점차 문벌 혈통본위를 벗어나 능력본위로 전환하여 신분차별과 직업귀천이 사라지는 평등사회로 들어섰을 것이었다. 바로 근대에 접근하는 과정이며 종래 주자학의 인간관, 신분직업관이 극복되는 길이기도 하였다. 이익이 헤쳐간 삶의 역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이 당쟁으로 희생되었고 이 충격으로 그는 벼슬을 일절 단념하고 경기 광주의 첨성리에 파묻혀 살았다. 물려받은 재산을 종가에 돌려준 뒤로는 생계조차 꾸리기 어려웠다. 70세가 넘어서는 벼슬하던 아들마저 죽고 병으로 더욱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난한 농민의 실상을 목격하면서 그 구제 방안을 찾기에 몰두하였다. 이렇게 사회의 현실문제를 자신의 학문과제로 승화시키는 태도는 그의 선배였던 유형원(柳馨遠)과 흡사했다. 사물 세계를 객관적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학문방법이나 과정도 그러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보이듯 관심대상이 매우 넓고 다양해서 제자백가는 물론 서학 천주교까지 두루 미친 데 있다. 또 유교의 성인관이나 화이관(華夷觀·중화중심 세계관)에서 탈피한 것이나 역사를 윤리 도덕의 실현이 아닌 객관사실의 인과적 상호관계로 보는 시세론(時勢論)의 관점을 세운 것도 그의 독특한 점이었다. 이익의 개혁사상은 가학(家學)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뒤를 따라 아들 조카 손자들도 실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종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로 유명하며 서학으로 알려진 이가환(李家煥)은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안정복(安鼎福) 권철신(權哲身) 신후담(愼後聃)을 비롯한 많은 제자도 두었다. 그들은 역사 지리 경제 경학 등 각 방면에서 이름을 떨쳤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임을 확신하고 실천에 옮긴 선구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성호학파의 다양한 개성과 규모는 18, 19세기의 새로운 시대변화를 옳게 이끌어가는 학문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그 흐름을 집대성한 실학자였다. 이익은 당쟁의 피해자였지만 좌절에 빠지거나 보복심리를 드러내지 않고 당쟁의 원인과 폐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해소 방안을 설득력있게 마련했다. 바로 이것이 실학자 이익의 선비다움이라 하겠다. 김준석(연세대교수·한국사) [약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논문 「조선전기의 사회사상」 「17세기 정통주자학파의 정치사회론」 「조선후기의 당쟁과 왕권론의 추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