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놓인 동해가 다시 한번 ‘거친 혼란의 바다(Troubled Waters)’로 바뀔 운명에 처해 있다. 일본 정부가 23일 한일어업협정의 일방적 파기를 우리 정부에 공식 통보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은 그동안 새로운 어업수역획정을 위한 협상을 벌여왔는데 일본이 국내의 압력을 이용, 우리의 양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어업협정의 파기를 결정해버린 것이다. ▼동해서 나포 반발 가능성▼ 이로써 한일 양국은 어업협정 규정에 따라 앞으로 1년간 기존 체제 아래서 조업하지만 이 기간내에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동해는 각자의 주장에 근거한 상대방 어선 나포사태가 빈발하는 무질서 상태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협정 파기의 표면적 이유는 새로운 어업수역 획정협상에서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업할 수 있는 잠정수역의 일본쪽 한계선과 양국의 전속 어업 관할수역의 폭(幅)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양국이 공동 조업할 수 있는 수역을 보다 넓게 주장한 반면 일본은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수역을 보다 크게 가질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국의 주장은 지난해말 일본 외무성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차관의 방한시 의견 차이가 좁혀져 타결기미가 보였으나 일본이 태도를 변경, 협정의 일방적 파기라는 외교상 극히 비우호적인 속내를 내보인 것이다. 어업협정 파기에 따른 파장과 영향은 매우 크다. 우리 정부도 일본의 연근해 공해에 대해 시행해왔던 조업자율규제조치를 즉각 중단키로 결정했다. 전반적인 한일관계에도 불신과 틈이 생길 것이 예상된다. 이를 일본이 결코 모를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이 무슨 이유로 이 시점에서 파기를 강행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그동안 일본은 동북아 해양문제에 관한 한 어느 한 나라의 일방적 조치가 다른 나라와 지역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 비교적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일례로 70년대 후반 배타적 경제수역(EEZ)개념이 세계를 유행병처럼 휩쓸 때에도 일본은 태평양쪽에 대해서만 EEZ를 적용하고 동해와 동중국해에 대해서는 이를 유보한 바 있다. 중국식의 무리한 직선기선획정 등 일방적인 해양관할권 선포를 비난해 왔다. 그러나 최근 2∼3년간 일본은 과거와 달리 해양문제에 관한 중국식의 태도를 답습, 일방적이고도 무리한 조치를 남발하고 있다. 지난해 1월1일부터 시행된 영해기준선에 관한 직선기선 발표와 이에 따른 우리 어선의 나포가 그렇고 한일 어업협정의 일방적 파기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일본이 외교적 관례를 깨고 무리하게 나오는 이유는 국내 정치의 어려움을 타파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책략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취약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정권은 자신의 기반확충을 위해 외교를 희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국내의 정치적인 동기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대외관계의 파장을 일본이 모두 책임져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외관계 파장 日에 책임▼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한일어업협정의 일방적 파기가 과거에 유지돼 왔던 일본의 대한(對韓)정책 변화를 시사하는 전초적인 신호탄인가 하는 문제다. 한일 양국은 앞으로 1년간 새로운 어업협정을 마련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갈 것이다. 협정의 대체적 방향은 이미 두 나라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시켜 왔기 때문에 실제협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동해가 ‘혼란의 바다’로 방치되지 않기 위해 일본은 국내 정치적 압력을 배제, 일방적이고도 무리한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 우리도 어업문제로 인한 상대방의 고뇌를 이해하는 포용의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이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