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2일째인 93년3월9일. 취임이후 숨돌릴 틈 없이 연일 개혁정책을 쏟아놓아 온 김대통령은 각언론사의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을 청와대로 초청, 만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또 하나의 ‘깜짝놀랄’ 발표를 했다. 남북한간의 미해결현안이었던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李仁模·당시75세)노인의 북송방침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개혁정책으로 치솟는 인기에 만족한 탓인지, 만찬내내 시종 기분좋은 표정이었다. 결국 김대통령은 남북관계의 현황을 설명하던 끝에 “취임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니 선물을 주겠다”며 이씨의 송환방침을 털어놓았다. 청와대와 해당부서인 통일원은 비상이 걸렸다. 이 문제가 관계부처간에 충분한 사전정책협의와 조율을 거치지 않은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전날인 8일 통일원측은 일부언론의 ‘추측성보도’에 대해 “정부내에서 이씨의 송환문제를 검토한 바 없다”는 대변인 논평까지 낸 터였다. ▼ 『취임선물 주겠다』 깜짝발표 ▼ 이씨의 송환문제는 김대통령의 만찬발언 며칠전에 한완상(韓完相)통일부총리가 상황설명을 겸해 건의하기는 했으나 검토과제로 남겨두었던 사안이다. 한전부총리(현방송통신대총장)가 처음 털어놓은 당시 상황. “3월2일 취임후 첫 독대(獨對)보고자리에서 ‘새정부의 명칭에 숫자를 붙이는 관행은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한 뒤 이씨문제를 꺼냈다. 당시 이씨의 건강이 매우 악화해 재야쪽에서는 그대로 죽을 경우 시신처리 때문에 우리의 입장이 곤란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등 국제인권단체들이 ‘정치적인 희생자’로 보고 있어 전정권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정치적인 탄압을 했다는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 ‘우리는 북한보다 14배나 잘산다. 국제적으로 북한이 고립돼 있는 만큼 자신감을 갖고 지난 정부와 달리 대국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인도주의는 ‘때문에’의 논리가 아니라 ‘불구하고’의 논리란 점을 설명했다.” 한전부총리는 “그러나 보고이후 만찬석상에서 발언할 때까지 김대통령으로부터 이 문제에 관해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안기부쪽에도 전혀 구체적인 검토지시가 없었다. 김덕(金悳)당시안기부장(현한나라당의원)도 “이씨의 북송문제에 관해 김대통령으로부터 사전에 상의를 받거나 송환에 따른 득실을 분석해보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씨의 송환문제는 돌발적으로 불거진 사안은 아니다. 90년말부터 91년초에 걸쳐 그의 수기가 ‘말’지에 연재된 것을 계기로 송환주장이 재야쪽에서 계속 제기됐다. 북한은 이후 남북접촉 때마다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결론은 내지 못했지만 6공에서도 그의 북송문제는 검토됐던 사안이었다. 당시 이씨의 송환에 대해 정부일각에서도 긍정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만찬에 배석했던 박관용(朴寬用)비서실장의 증언은 이런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김대통령이 당선자이던 시절 나도 재야쪽 변호사들과 만나 이씨의 송환문제를 여러 차례 얘기했다. 북쪽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도 괜찮을 것 같아 나자신도 ‘유효적절한 카드’라고 생각했었다.” 문제는 정책의 타이밍과 정책에 수반되는 득실에 대한 검토없이 대통령 ‘홀로 뛰는’방식으로 이루어진 결정과정이었다. 한마디로 김대통령 특유의 ‘감(感)’과 ‘순발력’이 발휘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된 이씨송환의 후유증은 간단치 않았다. ▼ 여야 구분없이 일제히 비난 ▼ 청와대측은 이날 밤 부랴부랴 보도자제를 요청, 일단 응급조치에는 성공했으나 계속 공식발표를 미룰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롯데호텔에서 한부총리와 한승주(韓昇洲)외무장관 권영해(權寧海)국방장관 김덕안기부장 박관용비서실장 정종욱(鄭鍾旭)외교안보수석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통일관계전략회의’.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갑작스러운 송환방침결정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편집국장 보도국장단과의 만찬석상에서 김대통령이 이씨 송환방침을 밝힌 사실이 알려지자 ‘엎질러진 물’이라면서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 김대통령은 나중에 청와대비서진들에게 “우리가 조건없이 그들의 영웅을 보내면 그들도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어 좋은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후문이다. 95년6월 지방자치선거직전 대(對)북한 쌀원조와 관련, 김대통령이 “부족하면 국제시장에서 사서라도 줄 수 있다”고 발언한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씨의 송환방침이 공식결정된 직후인12일북한은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의 NPT탈퇴선언직후 긴급소집된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이씨송환결정에 대해 “전술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란 비판이 터져 나왔다. 여야구별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일하고 뺨맞은’격이 된 셈이었다. ▼ 대북정책 강경노선 선회 ▼ 더욱 심각한 것은 국내보수진영의 반발로 야기된 역풍(逆風)이었다.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취임사 내용에서부터 문민정부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보여온 우파와 보수세력의 반발은 이씨송환을 계기로 갈수록 거세졌다. 특히 김대통령이 이해 8월 금융실명제를 전격단행한 후 “가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겠다”고 발언한 것은 이들의 경계심을 한층 증폭시킨 계기가 됐다. 우파인사들과 보수진영은 “청와대 내부와 새정부안에 좌파들이 침투, 김대통령이 포로가 됐다”며 ‘좌파(左派)시비’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시 한부총리와 재야출신인 김정남(金正男)교문수석에 대한 투서가 2백여통이나 들어왔다”고 밝혔다. 6대국회 때부터 김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래 문민정부 출범이후에도 김대통령에게 수시로 각종 조언을 해온 K변호사의 경우도 김대통령에게 직접 직설적인 불만을 표시한 인물중의 한사람. 김대통령과 K변호사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한 여권관계자의 술회. “그는 금융실명제에 반대한 것은 물론 안기부 경찰을 약화시키고 재야출신인사들을 청와대와 정부요직에 기용한 데 대해 김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불만을 털어놓았다. 결국 그의 충고는 정부내 진보적 인사들의 퇴진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시작됐다. 한부총리가 대선패배후 영국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김대중(金大中)전민주당총재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에 보낸 백두산 천지사진을 둘러싼 해프닝은 한가지 예. 한부총리는 취임후 박준규(朴浚圭)국회의장 이기택(李基澤)민주당총재 정재문(鄭在文)외무통일위원장 등에게 ‘통일부총리 한완상 증(贈)’이라는 사인을 해 백두산 천지사진을 두루 선물로 보냈다. 때마침 백두산 상공에서 찍은 좋은 사진이 입수됐기에 기념으로 보낸 것. 이해 여름 어느날 통일원의 한 실무자가 “아태재단의 개소식이 있다”며 기증을 건의하자 한부총리는 “좋은 생각”이라며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 직후 청와대에 들른 한부총리는 비서실관계자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는다. ‘DJ(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에게 비싼 그림을 밤중에 몰래 갖다 주었다’는 보고를 듣고 김대통령이 화를 냈다는 귀띔이었다. 이 보고서는 모기관이 김대통령에게 비선조직을 통해 직보한 것. 결론은 ‘한부총리가 오래전부터 DJ쪽과 내통해 왔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부총리는 이해 12월 전격경질됐다. 그것도 김대통령의 통보가 아니라 경질 한시간 전 박관용실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뿐이다. 김정남수석은 1년 후인 94년12월말 청와대를 떠났다. 아무튼 북한의 NPT탈퇴선언에도 불구하고 미전향장기수 이인모노인은 3월19일 북측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때까지는 흔들리지 않고 ‘동기가 좋으면 결과도 좋다’고 믿었던 김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94년7월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개최가 무산되고 95년 여름 북한에 대한 쌀원조가 ‘역이용당한’결과로 끝난 뒤 김대통령은 ‘북한은 곧 망할 정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잇단 대북(對北)정책의 시행착오가 시계추를 강경노선 쪽으로 몰고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동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