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은 내리고 주식값은 오르는 그래프. 아침 신문을 보면서 안도한다. 한국의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외국 돈이 대기 상태라고 한다. 글쎄, 이젠 숨을 돌려도 되는 것인가. 바로 외국 자본의 「썰물」로 빚어진 숨가쁜 혼란, 불과 석달 안팎의 외환대란 국제통화기금(IMF)충격. 크고 작은 기업이 무너져 가고 수많은 가장들이 일터에서 내쫓기는 참혹한 현실. 벌써 외국 자본의 밀물이라니 어지럽다. 좋든 싫든 우리는 세계 앞에 완전히 열려 있다. 남편의 수입도 아내의 장바구니 지출도 아이들의 동전지갑도 죄다 바깥 사정의 영향을 받는다. 열린다는 것은 솔직히 두려움이다.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지구촌 사정에 우리 안방 생계와 주머니 사정이 걸리고 운명이 내맡겨져 있다니. 새삼스럽게 1백20여년 전 개항을 반대하던 선비 최익현(崔益鉉)의 흉중을 헤아려 본다. 문호개방을 두려워하던 그의 상소를 떠올린다. ‘힘의 열세를 노출하면서 적(일본)에게 걸화(乞和)한다면 그 이후 적의 무궁한 침략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공업국 일본의 무한대한 역량에 우리 농업 생산품이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경제파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금수(禽獸) 같은 서양인 풍속에 젖어있는 일본인과 왕래하게 되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은 훼손되어 결국 국가기강 법도가 흐트러질 것이다.’ 최익현 시대는 태평양이라는 공간이 넓었다. 그 횡단에 몇달이 걸리던 때였다. 일본에 가려해도 며칠이 걸려야 했다. 그래도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말 지금은 서울의 증권시황 외환시세가 뉴욕자본시장이나 도쿄증권시장과 분 초 단위로 맞물려 돌아간다. 그런 동시적 국제시장 구조에서는 외채문제를 애걸하듯 협상(乞和)해야 하고 시장개방 압력에 발가벗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의 가요 영화 같은 것에 대해서도 왜색 걱정으로 더이상 틀어막고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다. 세계는 동시적으로 굴러간다.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하찮은 ‘지퍼 스캔들’이 우리 외채협상 진전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보았다. 옛날 같으면 먼 나라에 불과하던 동남아, 그곳 외환사정이 나빠지면 당장 우리 외환시장에도 태풍이 분다. 궁극적으로 외환난이 타개되고 경제가 정상화하려면 역시 우리 물건을 바깥에서 많이 사주어야 하고, 이땅에서 이득을 노리는 바깥 돈이 쏟아져 들어와야 한다. 지금의 일시적인 자본 밀물도 언제 썰물이 될지 모른다. 좁은 지구위의 코를 맞댄 생존경쟁을 회피할 길은 없다. 그래서 우리의 바깥 세계에 대한 연구분석과 정보공급, 그리고 대응이 훨씬 강화되어야 한다. 아무래도 세계를 잘 알고 대처를 주도하는 사람이 적은 것만 같다. 설사그런이가있어도 힘을 쓰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나락과 같은 IMF국면에 굴러떨어지는 것이 그것을 입증하지 않는가. 일본만 해도 우리보다는 세계 지향성이라고 할까, 국제성에 더 강점을 지닌 것 같다. 에도(江戶)시대부터 나가사키를 창구로 해서 서양문물에 접해온 것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조차 없다. 일본 돈 1만엔권에 얼굴이 나오는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최근의 평전들을 읽어보면 예외없이 ‘1백년 전에 이런 국제 감각을 지닌 불가사의한 인물이 있었을까 놀라게 된다’는 평이 덧붙어 있다. 거기엔 1백여년 전부터 아예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나 프랑스어를 일상어로 쓰자고 외친 일본 지식인들이 있었다. 비록 뭘 모르는 짓들이었으며 그 때문에 살인도 빚어졌지만 거기서 일본인들의 피나는 몸부림을 읽는다. 그러한 국제적 적응노력이 우리와는 다른 20세기를 걷게 한 것이 아닐까. 연초가 되면 도쿄의 서점 입구는 경제예측서와 세계전망 서적으로 뒤덮인다. 세계를 연구하고 미래를 말하는 한국 사람이 더 늘어야 한다. 그들이 대접받아야 하며 그들의 저술이 불티나게 팔려야 한다. IMF사태는 한번으로 족하다. 김충식(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