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성사의 최고봉인 다산 정약용.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천문 기상 의학 수학 기하학 농학 지리 물리 화학 등 다산의 관심사는 그 한계가 없었다. 다산이 당시 천대받던 학문분야에까지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학문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정신,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애민정신의 발로였다. 다산의 과학적 업적은 한강 배다리(주교·舟橋, 부교·浮橋)건설, 수원 화성(華城)설계, 기중기 발명 등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1789년 28세때 설계한 한강 배다리는 조선에서 처음 시도하는 혁신적 기술이었다. 배 60여척을 강물에 띄우고 그 위에 2천여장이 넘는 널판지를 깔아 다리를 만들었다. 이 배다리는 배로 건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갈 때 주로 이용했다. 1792년엔 수원 화성을 설계했다. 다산의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과학적이고 창의적이었다.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앞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옹성(甕城), 적이 성벽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포루(砲樓)와 적루(敵樓),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현안(懸眼), 적의 화공(火攻)을 막기 위해 물을 쏟아붓는 누조(漏槽)등. 튼튼한 벽돌을 이용했음은 물론이고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 성의 높이나 거리 등을 측량함으로써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도록 했다. 이렇게 탄생한 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다. 그 수원 화성을 짓기 위해 일꾼들이 힘겹게 돌을 지고 나르는 것을 목격한 다산은 2년 뒤 기중기를 만들어 냈다. 이 기중기는 실제 화성 축조에 이용돼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고 수원 화성을 짓고 싶었던 다산과 정조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다산은 또한 천연두 처방 등 생활의학정보를 담은 ‘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의학서를 쓰기도 했으니 다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으리라.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