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편입시험을 보러 간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줌마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 엄마’하고 아는체했는데 그 아줌마는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오늘 여기에 오면 틀림없이 누구를 만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유를 알아보니 그는 절에서 일일파출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나 쑥스러워 하는지 도리어 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의 나이가 마흔줄에 들었지만 고생을 덜 해봤는지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거듭 다짐을 받아내려 했는데 그 모습이 천진스러워 보이기조차 했다. 쉰이 다된 나로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터라 “별걸 다 신경쓰네요. 나는 더 험한 일도 해봤고 사람이 살다보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요”라며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그리고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고 약속했다. 사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반상회 때나 한번씩 만나고 어쩌다 승강기에서 지나칠 때도 있지만 누가 남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겠으며 또 알려진들 뭐가 그리 창피한 일이냐며 ‘선배님’ 앞에서 문자쓰지 말라고 충고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불현듯 고생했던 지난 일들이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꼭 18년이 지났다. 시골에서 갓 올라와 두 어린 것들만 집에 놔두고 직장에 갔다 돌아와보니 하루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엄마 오기를 기다리다 지쳐 마중을 나섰다가 길을 잃은 것이다. 어둠이 깔린 골목을 샅샅이 찾아 헤맨 끝에 길가 한구석에 형제가 나란히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리고 큰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 집에 파출부 일을 다니기도 했으니 자존심 따위는 졸업한 지 오래다. 지금 불어닥친 ‘IMF 삭풍’은 보잘 것 없는 체면이나 자존심은 모두 벗어 던지고 실속있고 진실되게 살라고 찾아온 귀중한 손님이란 역설적인 생각도 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아줌마의 비밀을 떠올려본다. 김해숙(경기 군포시 산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