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주 일본의 몇몇 도시를 순방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남북한의 최근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결과는 ‘상심(傷心)’이었다. 그들의 비관적인 또는 냉소적인 분석에 자존심이 마구 상했다. 우선 북에 대해 그들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했다. 식량 위기는 앞으로 북한이 존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북한의 국가적 침몰 역시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 비판-냉소적 분위기 팽배 ▼ 그러한 북한에 투자할 기업인은 일본에 전혀 없을 것이고, 그러한 북한과 수교해야겠다고 여론을 움직일 정치인이나 관리는 아예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강조했다. 최근 내각의 여론담당기관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북한은 일본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나타났다. 이것은 지난 몇해동안 계속된 현상이어서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싫어하는 비율이 급증한다는 데 있다고 그들은 지적했다. 일본 외무성의 비공식 분석으로는 미국도 북한에 경제 지원을 베풀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 지원은 비교적 낫겠으나 북한의 경제 위기에 비춰 턱없이 낮다. 그렇다면 북한이 의지할 대상은 남쪽 밖에 없는데, 남쪽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 놓일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북을 돌 볼 형편이 못된다. 이래 저래 북한은 이미 ‘붕괴의 궤도’ 위에 올라서 있다는 데 그들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아마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의 5년 임기안에 북한의 ‘대격변’을 보게 될 것이라는 합의를 느낄 수 있었다. 남쪽의 경제적 장래에 대해 그들은 ‘신중한 우려’를 표시했다.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제국주의적’ 국제체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미국이 우선 취약한 동아시아 경제권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일본도 흔들리고 있고 머지않아 중국도 흔들릴 터에 이미 창(槍)에 깊이 찔린 한국이 어떻게 한두해 안에 경제 소생을 꾀할 수 있겠느냐는 전망이었다. 일본이 한국 경제의 소생을 위해 도울 뜻이 없음도 필자는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지난 몇해사이 악화된 한일관계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일(反日)감정을 강하게 표출해 온 한국 사람들을 위해 ‘선심’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김영삼(金泳三)정권 아래서 악화된 두나라 관계의 ‘복원’이 중요한 외교과제로 이미 제기됐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장래에 쏠려 있었다.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한국이 오늘날의 경제위기 때문에 이 기구의 경수로 건설사업을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었다. 미국도 일본도 비용분담에 대해서는 냉담한 터에 한국마저 두손을 들어버리게 될 때, 북한은 우리 쪽의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자신의 핵동결 약속을 철회할 수 있음을 그들은 걱정했다. 만일 북한이 그러한 길을 걷게 된다고 가상해 보자. 북한의 ‘핵위협’은 되살아나게 되고 한반도는 다시 군사적 긴장 속에 잠기게 된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국제투자의 여건을 나쁘게 만들 것이다. ▼ KEDO 장래에 깊은 관심 ▼ 98년 올해는 남과 북 모두에 ‘국가수립 50주년’의 상서로운 해이다. 남북 모두에서 새 정권이 공식 출범함으로써 남북관계에 발전적 국면을 열어갈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앞날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일 북한에서 ‘대변혁’이 일어날 때, 그 상황을 우리가 적절히 요리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이래 저래 우울한 기분으로 ‘일본 상심(傷心)여행’에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