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勞使政)이 다시 국가부도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약속한 개혁프로그램을 제도화하기 위한 시급한 입법과제들을 안고 있는 정치권은 당리당략과 힘겨루기에 얽매여 아까운 국회 회기를 허송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대표가 합의한 노사정위원회 ‘국민협약안’을 거부하며 총파업을 선언, 외국 금융기관과 투자자 등의 한국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재계는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 앞에서는 재벌개혁에 나서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종래의 경영행태를 유지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와 비상경제대책위 등은 검증되지도 않은 각종 정책과 대책을 무원칙하게 쏟아내 정책혼선을 빚고, 경제현장의 방향감각을 흩트려놓고 있다. 현정부의 국정책임자들과 경제부처들은 경제청문회 감사원감사 정부조직개편 등을 앞에 놓고 행정공백을 넘어 사실상 기능와해 상태에 빠진채 ‘내 살 길’만 찾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도 지난달말의 뉴욕 외채협상 타결 이후 국가부도 위기에 대한 경계감이 상당히 풀리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을 목격한 외국의 채권기관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외채 상환연장을 망설이는 자세로 돌아서고 있다. 그런 가운데 국제사회가 뉴욕 외채협상을 통해 한국에 선사한 ‘3월말까지의 부도유예(외채 만기연장)’ 시한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정부와 금융계에 따르면 특히 민노총의 파업선언과 재벌의 개혁거부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를 급격히 떨어뜨릴 조짐이다. 재정경제원 관계자는 12일 “민노총이 파업에 돌입하면 17일 결정되는 IMF의 20억달러 추가지원이 불투명해진다”며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사(S&P)와 무디스사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하려던 방침을 바꾸어 오히려 하향조정할 움직임”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렇게 되면 뉴욕 외채협상에서 합의한 2백40억달러 규모의 단기외채 장기전환도 해당 금융기관간 개별협상 과정에서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며 “이에 따라 서방선진 7개국(G7)의 80억달러 지원도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만일 3월말까지 단기외채의 장기전환을 위한 개별협상이 제대로 타결되지 않으면 3월말까지 유예된 외채상환이 4월초부터 일시에 몰릴 수밖에 없다. 특히 외채협상에서 제외된 국내기업들의 해외 현지금융에 대한 상환요구가 몰리면 한 순간에 모라토리엄(외채지불유예―정지)상태에 빠질 것으로 우려된다. 재경원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해외 현지금융은 작년말 현재 6백억달러 수준에 달하며 이중 무역금융 3백60억달러를 제외한 2백40억달러 정도가 순수 차입금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달말과 다음달초 상환요구가 돌아올 기업의 현지금융만도 1백억달러 안팎으로 추산된다. 대외신인도가 올라가면 상환요구가 줄겠지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추가 상환요구가 몰릴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외국은행들은 국내기업들의 현지금융 채권에 대해 조기 회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한국에 대한 채권의 30%를 차지하는 일본계 은행들이 3월말 결산을 앞두고 국제결제은행(BIS)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자금회수에 나서는 상황이다. 외국 언론들도 한국의 위기상황을 속속 보도하고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지는 11일 서울발 기사를 통해 “민노총의 총파업 요구로 인해 4일째 상승세를 타던 주가가 외국인 투자의 위축으로 10일 2.2%나 떨어졌다”며 노사정 합의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이던 한국 경제가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됐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지도 이날 민노총의 총파업 선언은 개혁을 향한 한국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 노동자중 얼마가 총파업을 지지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지도 ‘개혁을 거부한 노조’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민노총의 총파업 위협은 IMF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김차기대통령의 개혁이행 프로그램에 대한 중대한 첫번째 시련”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