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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16>]역사에 묻힐뻔한「노태우비자금」

입력 | 1998-02-12 19:54:00


안영모(安永模)동화은행장 비자금 수사가 한창이던 93년 5월초. 안행장의 비자금 루트를 추적하던 함승희(咸承熙)검사에게 의외의 사실이 포착됐다. 안행장의 비자금의 꼬리가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李賢雨)씨 계좌에 연결돼 있었다. “은행장과 대통령경호실장이 무슨 관계일까. 경호실장은 은행장 연임을 청탁할 자리가 아닌데….” 뭔가 내막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함검사는 일단 동화은행 직원들을 불렀다. 검찰에 불려온 직원들은 “대통령경호실에서 관리하는 계좌”라고 순순히 털어놨다. 이때만해도 함검사는 대통령경호실 친목회 공금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계좌를 더 뒤져보니 수십억원의 뭉칫돈이 들어있었다. “혹시 대통령경호실에서 사용하는 정치 공작금이 아닐까. 과거정권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이 정치공작을 한 사례도 있으니까.” 의문이 풀리지 않자 함검사는 안행장을 불렀다. “이현우실장에게 돈을 준 사실이 있지요? 대통령 경호실장은 은행장 연임과 상관이 없는 데 왜 돈을 주었습니까.” 한동안 망설이던 안행장이 체념한듯 입을 열었다. “이실장 개인 계좌에 넣어준 2억1천만원은 저희 은행에 큰 돈을 예치해준 데 대한 사례비입니다. 뇌물로 준 것은 아닙니다.” 함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래요, 이실장이 얼마나 예치했습니까?” “1천억원 가량 됩니다.” 함검사는 순간적으로 이 돈의 주인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일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곧바로 사실확인에 들어갔다. 이현우씨의 은행 심부름을 한 대통령 경호실 경리계장 이태진(李泰珍)씨의 신원을 파악했다. 이씨의 사진도 확보했다. 이태진씨는 수백개의 가명계좌를 개설하면서 도장은 한개만 사용한 사실을 알아냈다. 수사팀은 동화은행 모든 지점을 뒤져 이씨의 가명도장이 찍힌 계좌들을 찾아냈다. 입금액은 1천억원 가량 됐다. 안행장의 진술이 사실로 입증됐다. 93년 5월 중순 서울 서소문 구(舊)대검청사 8층 검찰 고위간부 사무실. 함검사는 흥분을 억누르며 이현우씨의 비리를 보고했다. ▼ 이현우 집어넣읍시다 ▼ “수사결과 6공 대통령경호실장을 지낸 이현우씨의 개인비리가 드러났습니다. 소환해서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순간 상대방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함검사, 그건 절대 안돼.(수사를 하면)그 사람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함검사도 잘 알잖아.” 이씨를 형사처벌할 경우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그러면 노씨의 비자금 조성 및 퇴임 후 관리사실이 드러나 일파만파의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함검사는 그후 여러차례 검찰 수뇌부에 수사를 건의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씨는 그렇게 해서 구속은커녕 형사입건도 되지 않고 말았다. 그러나 검찰수뇌부의 판단은 달랐던거죠.” 검찰 수뇌부가 이현우씨의 조사를 막은 이유는 또 있었다. 검찰에서 노씨의 비자금 계좌를 건드리자 노씨측에서 즉각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6공 당시 정보기관의 장을 지낸 모인사는 검찰 고위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왜 이러는 거요.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진의가 뭐요.” “수사를 하다보니 우연히 노전대통령 관련계좌가 드러난 것 뿐입니다.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검찰 간부는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했다. 그러면 당시 김대통령은 노씨가 1천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온 사실을 알았을까. 김영수(金榮秀)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검찰에서 그런 내용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노씨 비자금 수사가 일단 물건너간 지 반년 정도 지난 93년 11월 중순. 서산지청장으로 가있던 함검사에게 대검 고위간부 K씨가 ‘저녁이나 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바로 다음날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 K씨와 함검사가 마주앉았다. 함검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입니까.” K씨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용건을 털어놓았다. “함검사, 동화은행 사건 때 추적했던 이현우 계좌 있지. 그 자료 좀 줘야겠어.” 함검사는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토록 수사하자고 할 때는 못하게 하더니 이제 와서 수사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K씨가 함검사를 달랬다. “그쪽(노전대통령)의 자금을 건드리려는 것은 아니야. 이현우씨를 개인비리로 잡아넣을 필요가 있어서 그래….” K씨는 이번 일이 검찰 수뇌부와 집권세력간의 사전 교감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투로 얘기했다. 함검사는 K씨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결국 노씨의 비자금 자료를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정치권에는 5, 6공 세력이 정당을 창당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때였다.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 “당시 집권세력은 5, 6공 세력이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어요. 그들이 축재한 자금과 자신들의 인맥을 바탕으로 정당을 결성해 총선이나 지방선거에 참여하면 큰 일이라고 걱정했어요. 따라서 이들의 발목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거죠. 검찰이 노씨의 비자금을 추적했다면 비자금의 규모를 알아볼 요량으로 그랬을 겁니다.” 그로부터 몇개월 뒤인 94년 봄. 대검 중수부는 노씨의 비자금을 은밀하게 내사했다. 노씨에게 돈을 준 재벌그룹 총수들도 불러 조사했다. 그렇게 파악된 노씨의 비자금은 함검사가 파악했던 1천억원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수사 관계자의 설명. “상부에서 불러서 갔더니 계좌번호를 주면서 추적해보라고 하더군요. 계좌추적을 해보니 이현우씨가 관리한 노태우씨의 계좌였어요. 나중에서야 문제의 계좌를 함검사가 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씨와의 관계 등을 고려한듯 내사로 끝낸 노씨 비자금은 1년반 뒤 그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집권세력이 노씨의 비자금을 수사해도 될 상황이 됐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 검찰이 마침내 칼을 휘두른 것이다. 민주당 박계동(朴啓東)의원이 국회에서 노씨 비자금을 폭로한 지 3일 뒤인 95년 10월22일 오후4시반경 대검찰청. 이현우씨가 한시간 전쯤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노씨측에 ‘돈의 주인이 아니냐’고 물었으나 노씨측은 부인하는 상황이었다. 노씨는 “나도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돈세탁을 과신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 검찰간부들 하수인 전락 ▼ 그무렵 동아일보 법조출입 K기자는 평소 잘아는 검찰 고위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현우씨의 은행 돈심부름을 한 남자가 있다면서요. 검찰도 이미 그사람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다던데요.” K기자가 넘겨짚은 말에 이 고위간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순순히 시인했다. “6공 때 청와대에서 경리과장으로 근무했던 40대 남자라고 들은 것 같애. 이과장이라고 하던가.” 이태진씨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검찰은 94년 봄 노씨 비자금 내사 때 확보한 자료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씨 비자금 수사가 시작된 지 근 한달만인 11월17일 이현우씨는 결국 구속됐다. 혐의내용은 기업에서 돈을 받은 것도 있지만 함검사가 2년 전 동화은행 사건 때 밝혀낸 개인비리도 포함돼 있었다. 구속영장에는 이씨의 개인비리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91년 청와대 경호실장 집무실에서 당시 동화은행장 안영모로부터 피의자가 관리중인 노태우대통령의 자금 중 1천억원을 동화은행에 예치해 준 데 대한 사례로 7차례에 걸쳐 2억1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있다.’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 속에 몰아넣은 노씨 비자금 사건은 검찰 수뇌부의 의지만 있었다면 문민정부 출범 초기에 이미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권의 이해관계 때문에 결과적으로 2년 반이나 국민을 속인 셈이었다. 함승희 변호사의 회고.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은 왜곡된 정치논리만 아니었다면 여러모로 검찰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김대통령의 사정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정략적으로 이뤄진 측면이 강합니다. 그때 끝까지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혁명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과거의 업보 때문에 개혁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은인자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기대·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