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땅에 묻으며 남은 사람들은 오열했다. 이제 막 자기세계를 구축했는데, 한창 예술이 무르익었는데,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도 많을텐데. 40대초반. 그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조각가 박희선(1956∼97)과 서양화가 강재화(1954∼97). 두사람 모두 지난해 3월 세상을 떴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고 했던가. 그들이 남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금방이라도 곧 살아서 돌아올 것만 같다. 두사람이 떠난지 꼭 1년. 남아있는 이땅의 선배 동료 후배들이 그들을 기리는 추모유작전을 마련했다. 박희선 유작전은 18일∼3월4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모란갤러리(02―737―0057).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오는 격랑의 시대에 대학(서울대미대 대학원)에 다닌 그는 피가 진했다. 그의 조각작업 주제는 한국의 역사 분단 통일…. 분단이란 질곡과 그것을 해소하는 통일의 염원을 안고 있는 한반도는 그의 작업의 일관된 화두였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은 두팔, 네개의 도끼를 기둥삼아 그위에 얹힌 나무판, 커다란 두 나무통의 입맞춤, 당장이라도 큰 소리가 터질 것만 같은 입술…. 어떻게 보면 ‘외침’이고 또 어떻게 보면 ‘속삭임’이다. 그는 브론즈나 화강석도 사용했지만 무엇보다 나무를 가장 사랑했다. 몇개의 나무토막을 암수틀로 짜맞춘 ‘바심’기법. 두나무가 서로를 죄어주기 때문에 견고한데다 서로 결이 다른 나무를 조형적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작품들은 항상 한국의 전통건축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그에게 ‘김종영조각상’(94년)을 수여한 김종영기념사업회주관. 강재화유작전은 25일∼3월3일 서울 종로구 공평동 공평아트센터(02―733―9512)에서 열린다. 중앙대를 졸업한 그는 풍경 인물 정물 등을 즐겨 그렸다. 90년대 들어 그의 작업은 ‘색조의 회화’로 정착된다. 그는 한국고유의 민족적 색채가 강조되는 민화의 형식미를 바탕으로 민화형식에 단청 조각보 등의 전통적인 문양을 끌어들여 장식적 요소를 강화했다. 원색적인 색채, 이미지의 선명성, 형태의 명확성, 화면분할을 통한 서로 다른 이미지의 대립…. 생전에 그는 “대상을 사실적인 형태로 고집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유로이 형태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나의 의식세계를 표출하고 있으며, 색채도 고정관념을 파괴시킴으로써 나만의 색채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강재화의 대학시절 단짝인 작가 우창훈은 그는 강재화의 작품에 대해 “인체와 꽃, 정물, 풍경, 새들이 정교한 터치의 리듬감과 함께 캔버스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강재화작품집’도 함께 나왔다. 〈송영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