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다시 ‘문학적 내실’이다. 우리경제가 알맹이 없는 양적 팽창을 했던 것처럼 문학에서도 작가와 작품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스타와 문제작으로 성급히 포장됐다.이제 그중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경제난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거품을 빼자는 자성이 이는 가운데 문단에서도 90년대 문학의 공과를 따지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집중포화의 표적인 이른바 ‘신세대문학’ ‘90년대 문학’의 당사자들은 ‘마녀사냥’이라고 비판에 맞서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문학이 재정비의 기로에 서 있다는 데는 양자간에 큰 이견이 없다.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세계의 문학’ 봄호에 기고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서 ‘삶의 심연을 응시하려 하지 않은 채, 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힘의 갈등을 외면한 채 정신적 육체적 향락을 추구하는’ 90년대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90년대적 잉여인간’으로 명명하고 “국제통화기금(IMF) 시대에 이런 인물들이 계속 유행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고 비관적 견해를 펼친다. 그러나 평론가 이성욱은 “IMF와 90년대 문학의 쇠망을 연결짓는 것은 기계론적 도식”이라고 비판한다. “90년대 작가들이 과거 우리 문학이 눈을 돌리지 못했던 성(性)정체성 육체 욕망 여성성 등으로 주제를 확장하며 인간이해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차라리 문학적 형상화가 미숙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문학적 형상화의 지리멸렬’은 작가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다. 등단 9년차 소설가 함정임(34)은 “황석영 박완서 박경리 조세희선배 등의 70년대 작품을 읽으며 우리 세대가 그들에 비해 얼마나 소설미학과 산문정신이 부족한지를 절감한다”고 고백한다. 소설이 양산되는 시대, 왜 소설미학은 뒷걸음질쳤을까. 한 30대 작가는 그 이유를 ‘전업작가의 양산’에서 찾는다. “원고료가 곧 생계비인 전업작가의 경우 쉴새없이 여기저기에 써대야 한다. 공부를 한다든지 단편소설 한편을 쓰기 위해 취재여행을 한다든지하는 공력들이기는 꿈도 꾸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공간, 즉 카페며 극장 오피스텔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지리멸렬한 일상을 맴돌거나 기껏해야 해외여행 체험담 정도를 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홍명희 박경리 한무숙선배의 작품을 읽으며 “말공부를 했다”는 중견작가 이문구는 후배들의 ‘공부부족’을 질타한다. “데뷔 10년이 넘은 작가들도 이광수 김동인은커녕 이호철 서기원 등 전후세대 작품조차 읽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문학을 뿌리부터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해외와 국내 베스트셀러들만을 편식하다보면 기껏해야 기교 흉내내기에 그칠 뿐이다.” 평론가 김윤식은 최근 몇년간 쓴 평문을 모은 한 비평집에서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언어의 밀도”라고 밝힌 바 있다. 90년대 문학과 함께 성장해온 젊은 평론가 이광호는 ‘90년대 소설이 지나치게 이미지중심’이라는 비판에 대해 “문제는 이미지과잉이 아니다. 이미지의 내적 논리를 얼마나 선명하게 밀고 나갔느냐로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고 수정제의한 바 있다. ‘90년대문학의 의의’를 주장하려는 작가들이 이런 평가잣대조차 ‘구시대적 문법’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출판계 불황으로 80년대 후반 이후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온 소설양산시스템은 당분간 작동하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작가들로서는 스스로를 엄격한 문학적 검증대위에 세워볼 수 있는 수련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