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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18]먹구름 끼는 朴哲彦의원

입력 | 1998-02-18 09:19:00


93년 5월 초순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 슬롯머신업계 대부로 불리던 정덕진(鄭德珍)씨가 홍준표(洪準杓·현 한나라당의원)검사에게 정관계의 비호세력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홍검사〓정회장님, 90년 특별 세무사찰을 받을 때 누구한테 로비했나요. 정씨〓원자탄을 썼습니다. 홍검사〓원자탄이라면…. 홍검사는 6공 당시 정보기관의 장을 지낸 S씨를 지목했다. 정씨의 반응이 신통찮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홍검사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그렇다면 박철언(朴哲彦)의원이군요.” “….” 마침내 박의원의 꼬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노태우(盧泰愚)정권 당시 슬롯머신 업계에서 박의원은 ‘그를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해서 ‘원자탄’으로 불렸다. 수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홍검사〓정회장님이 직접 박의원에게 돈을 줬나요. 정씨〓아닙니다. 동생 덕일이가 전해줬습니다. 홍검사〓덕일씨는 어떻게 박의원을 알게 됐나요. 정씨〓홍여사를 통해 알게 됐다고 합디다. 홍검사〓홍여사가 누굽니까. 정씨의 답변은 ‘성이 홍씨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만 옛날 부천에서 ‘뉴프린스’라는 장급여관을 경영한 적이 있고 87년 친구 소개로 정씨가 그 여관을 인수해 호텔로 변경하고 슬롯머신업 허가를 받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 『홍검사 정도면 싸워볼만』 ▼ 홍검사는 즉시 수사관을 부천으로 풀었다. 수사관들은 보존기간이 지난 폐쇄등기부까지 들춰 마침내 L호텔 등기부에서 홍씨의 이름을 발견했다. ‘홍성애(洪性愛·47). 주소 서울 종로구 평창동.’ 홍검사가 흥분한 표정으로 정씨와 다시 마주앉았다. “정회장님, 홍성애가 맞죠.” “홍검사님 정도면 박의원과 싸워볼 만하겠습니다. 덕일이가 박의원에게 건내준 수표는 추적이 안되는 것입니다. 박의원과의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씨는 홍여인의 신상을 잘 알고 있었으나 홍검사가 노련한 박의원과 싸울 수 있는 배짱과 근성이 있는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검찰은 조깅을 다녀오던 홍여인을 연행했다. 어려서부터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홍여인은 S여고 K대체육과를 졸업한 뒤인 70년 대한체육회 피겨연맹 임원으로 일하다 빼어난 미모로 당시 대한체육회장이던 김모의원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김의원과의 사이에 아들(15)을 낳고 생활하다가 김의원이 작고하자 평창동 집과 부천의 여관 등을 물려받았다. 그후 그녀는 화려한 미모와 세련된 매너를 바탕으로 정재계 체육계 연예계의 상류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져왔다. 검찰에 소환된 홍여인은 처음에는 박의원과의 관계를 일관되게 부인하는 의리를 보였다. 홍의원의 기억. “처음에 홍여인은 박의원을 겁내는 것 같았어요. 혹시 보복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지 않더군요. 그래서 검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보호해주겠다고 설득했죠.” 홍여인은 여섯번의 자술서와 진술조서를 쓴 끝에 박의원과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아시아경기 무렵인 86년 10월을 전후해 평소 알고 지내던 룸살롱 마담들과 이태원의 양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박의원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한달 후쯤 박의원이 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점심이나 하자’고 해서 신라호텔 프린스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박의원은 당시 안기부장 특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면 정덕일씨는 홍여인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정씨가 홍여인을 처음 만난 것은 84년 서울 하얏트호텔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때였다. “홍씨는 당시 1주일에 두세번 나이트클럽에 놀러오던 단골손님이었어요. 몇년 뒤부터 박의원의 얘기를 자주하면서 정계에 아는 사람이 많다고 은근히 자랑하더군요. 하루는 박의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오늘은 혼자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사람이 가까운 사이라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런데 홍여인이 박의원에게 등을 돌리게 된데는 박의원의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의원이 검찰에 소환되기 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정덕일씨에게서 돈받은 사실을 부인하면서 “정씨가 돈을 줬다면 홍씨가 중간에서 가로챘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홍검사가 건내준 박의원의 인터뷰 기사를 본 홍여인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박의원을 원망했다. “왜 연약한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비겁한 사람이에요.” 홍여인은 분이 안풀렸는지 묻지도 않은 박의원의 사생활까지 털어놨다. “86년 12월 하순쯤 박의원의 제의로 평창동 집에서 망년회를 한 적이 있어요. S건설 L회장, L주택 J부회장, L교수 등이 단골 룸살롱 등에서 젊은 여자들을 파트너로 데려왔어요. 그후에도 두차례 같은 방식으로 집에서 파티를 했습니다. 한번은 역시 룸살롱에서 박의원을 만났는데 그는 ‘북한에 특사로 갔다오는 길인데 산해진미에 코냑 등 없는 게 없더라. 대접 잘받고 왔다.’고 하더군요. 안기부의 흰색 그라나다를 타고 판문점을 넘어가 차를 바꿔 타고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또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왔는데 오자마자 보고서를 써서 연희동(노태우민정당대표)에 갔다주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어요. 북한을 다녀왔으면 전두환대통령에게 보고해야지 왜 연희동에 갔을까, 아마 다음에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나보다라고 생각했어요.” 이에 대해 박의원은 “사적인 모임에서 탤런트나 영화배우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노래부른 적이 있다”며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 함께 어울린 것뿐이었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수소문 끝에 박의원에게 직접 돈을 준 정덕일씨의 신병도 확보했다. 이제는 박의원과의 일전만 남겨두었다. 홍검사〓국세청의 세무조사 무마명목으로 박의원에게 5억원을 주었지요. 덕일씨〓네, 사실입니다. 90년 10월 초순 평창동 홍성애씨 집에서 박의원을 만나 돈가방을 건네주었습니다. 얘기가 다 끝나고 돈가방을 열어 박의원에게 보여주며 ‘의원님, 사조직 관리하는데 보태쓰시고 저희 업자들의 입장을 헤아려 청와대 사정의 오해를 풀어주십시오. 이 돈은 추적을 당하지 않는 헌 돈이니 걱정 말고 쓰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박의원 수사과정에서의 일화 한토막. 청와대는 수사 도중 수사팀에 ‘격려도 할 겸 수사진행상황도 알 겸’해서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으나 수사팀은 ‘괜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며 거절했다. 또 이미 박의원의 비리를 찾아보라고 비서관에게 은밀히 지시한 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수사과정에서 ‘표적수사’시비가 일자 “수사를 어떻게 하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느냐”며 검찰수뇌부를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다. ▼ 『이 여자좀 말려주시오』 ▼ 마침내 임시국회 폐회 다음날인 21일 오후 4시55분 박의원이 서울지검에 모습을 나타냈다. 박의원의 저항은 치열했다. 그는 홍여인의 집에 간 것만 시인하고 돈받은 사실은 철저하게 부인했다. 홍검사는 결국 박의원과 정덕일씨 홍여인의 3자 대질신문을 벌였다. 홍여인은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박의원님,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돈을 가져갔다구요.” “홍여사, 이건 내 인생이 걸린 문제예요. 정확히 진술해주시오.” “박의원님 인생만 인생이에요. 내 인생은 어떡하구요.” 홍여인은 분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박의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박의원은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자 홍검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홍검사, 이 여자 좀 말려주시오. 이 여자가 도대체 왜 이럽니까.” 소동이 진정된 뒤에야 대질신문은 시작됐다. 홍검사〓홍여인이 과일과 차를 들고 현관 옆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박의원과 함께 있던 덕일씨가 당황해 돈가방을 덮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정, 홍씨〓네, 사실입니다. 박의원〓현관문 옆방에 들어간 일도 없고 돈가방을 본 일도 없습니다. 박의원은 혐의내용을 극력 부인했지만 그날 밤 결국 구속됐다. 그는 그후 재판과정에서도 줄곧 돈받은 사실을 부인하며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홍여인의 진술은 박의원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박의원은 덕일씨에게서 돈을 받아간 날 밤 9시경 전화를 걸어 ‘홍사장, 뭐하나’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물었어요. 내가 ‘하긴 뭘해, 텔레비전 보고 있지’라고 말하니까 ‘허허’ 웃더군요. 그런 뒤 ‘아까 그 돈은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관리한다’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어요. 내가 그 돈을 받는 것을 봐서 민망해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죠.” 정덕일씨도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박의원에게 돈을 주었다는 그때의 진술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기대·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