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년 동안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의 진상을 함구해온 당시 중앙정보부 정보차장보 이철희(李哲熙)씨는 사건발생 25년만인 18일 “다시는 정보부 직원이 정치공작에 이용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증언한다”며 진상을 털어놓았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 했던 ‘기밀’을 털어놓는 순간 그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김대중씨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선거에서 이겨 취임식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공교로운 시점에…. 이씨는 먼저 “73년 봄 이후락(李厚洛)부장이 남산에 있던 나를 궁정동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김대중이 해외에서 시끄럽게 하니 무조건 데려오라’고 지시했다”며 이 사건이 이부장의 지시였음을 명확히 했다. 어렵게 기자와 만난 그는 연방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정보업무를 해온 사람답게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 자신과 하태준(河泰俊)해외공작국장(8국장)이 60년대 중정요원들이 베를린에서 무리하게 간첩체포작전을 벌인 후유증으로 해외공작업무가 마비상태였음을 들어 “일본의 치안상태가 좋아 잡음없는 공작수행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말썽만 난다”며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부장이 열흘 뒤 다시 자신을 불러 강한 어조로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무조건 김대중을 데려와.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반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알고 하국장과 윤진원(尹鎭遠)해외공작단장에게 납치계획수립을 지시했다는 것. 그는 또 자신이 업무지시를 김기완(金基完)주일공사에게 내리자 김공사 역시 심하게 반발,“내 선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니 반대의견을 부장께 직접 말하라고 했다”고 회고, 내부진통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씨는 하국장과 상의, 오랫동안 해외공작 업무를 담당해왔던 윤진원 8국 공작단장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 김대중을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이후 윤단장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8국 직원들을 중심으로 주일대사관에 파견된 중정직원과 함께 납치 계획을 짰다. 당시 중정측이 김대중씨를 납치, 암살할 계획이었다는 세간의 논란과 관련, 이씨는 “이부장의 지시는 분명히 ‘납치’였다”며 “만약 암살할 계획이었다면 해외공작팀이 아닌 다른 팀을 동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납치도중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될 뻔했던 김대중씨가 미국의 개입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미국측이 사건발생 이후 김대중씨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때문에 김씨가 살아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애초 계획대로 배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했고 항해도중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는 것. 이씨는 “정통성 없는 정부 때문에 해외업무를 담당했던 많은 중정직원들이 정치공작에 이용돼 그동안 쌓아왔던 경력을 망쳤다”며 “그들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씨는 79년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82년 거액 어음사기사건으로 부인 장영자(張玲子)씨와 함께 구속돼 91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94년 어음연쇄부도사건으로 부인 장씨가 재수감된 후에는 옥바라지를 위해 청주교도소 근처에서 4년째 혼자 살고 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