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8월13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대중(金大中)씨를 납치, 동교동 자택으로 강제송환시키는 ‘임무’에 성공한 중앙정보부는 또다른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진실을 은폐하느냐’는 것이었다. 납치사건 가담자는 중정요원 25명, 용금호 선원 21명을 합해 모두 46명. 알아서 비밀을 지켜줄 것으로 믿기에는 ‘입’이 너무 많았다. 중정이 사건에 가담한 중정요원과 용금호 선원들에 대해 각종 혜택을 주며 사후관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본보가 입수한 ‘KT사건관여인사 일람표’와 ‘용금호관계 인사 일람’을 분석한 결과 중정과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공작가담 중정요원과 용금호 선원들에게 비밀유지의 대가로 꾸준하게 몇가지 ‘당근’을 제공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중정요원들에 대해서는 보직상의 혜택을 주거나 취업알선, 예산지원 등의 방법을 썼다. 용금호 선원들에게도 취업알선이나 매점 등의 허가권제공, 보상금 지급 등으로 입을 막았다. 76년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관여인사 일람표’의 양식은 △직급 △성명 △납치사건 임무 △납치당시 직책 △현 직책(보고서작성 당시) △현직에 대한 의견 △해소 방안 △비고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눈을 끄는 대목이 ‘현직에 대한 의견’과 ‘해소방안’란. 한마디로 가담자들이 현직에서 느끼는 불만의 싹을 없애주려 했다. 한 예로 사건 당시 재일(在日)행동책이었던 김기완(金基完·미국 로스앤젤레스근무)8국해외공작관의 ‘현직에 대한 의견’란에는 ‘귀국 희망’이라고 적혀 있다. 그 ‘해소방안’으로는 ‘상응한 보직부여’로 돼있어 김씨가 원하는 대로 귀국시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김대중씨의 납치에 직접 가담했던 김병찬 당시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이나 유영복(劉永福)2등서기관은 각각 ‘보직변경 희망’과 ‘해파(海派·해외파견)철수로 사기저하’가 문제점으로 지적돼 있고 ‘상응한 보직 보장’을 해소책으로 제시했다. 인사상의 우대보다는 생계보장을 해주려 한 경우도 있다. 역시 납치조에 포함됐던 유충국(柳忠國)주일대사관 2등서기관의 현직의견란에는 ‘생계곤란’, 그 대책은 ‘특별예산 지원’. 불법적인 특수공작에 가담한 직원들에게 중정의 예산까지 지원한 셈이다. 오사카(大阪)총영사관 타자수로 오사카 안가(安家)로 납치된 김씨를 목격했던 김봉실(金鳳實)씨의 일람표에는 ‘이직시 생활기금 요(要)조치’로 돼있고, 오사카 총영사관 운전사로 있다가 후일 D그룹 운전사로 자리를 옮긴 안용덕(安龍德)씨 역시 생활기금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돼 있다. 용금호 선원들에 대한 ‘입 막음’도 치밀하게 이뤄졌다. 선원들에 대한 대책중 특이한 점은 사건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서약서’를 쓰게 하고 특별보상금까지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본보가 입수한 용금호 통신장 정용석(鄭容碩·50·부산거주)씨의 서약서 내용은 ‘본인은 과거 특정선박 승선기간중 지득한 일체의 사항이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사항임을 명심하고 지금까지 외부에 누설하지 않고 보안을 지켜왔으며 동 공로로 금번 특별보상금을 받게 되었는바, 이를 계기로 앞으로도 상기 사실에 대한 보안을 더욱 철저히 유지할 것’이라고 돼 있다. 서약서는 또 ‘본인은 금번 특별보상금과 과거의 협조 사실을 근거로 이를 재차 거론, 부당한 요구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차후 어떠한 요구도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오며 이를 위반시 동기여하를 막론하고 그 결과가 반국가적 행위임을 자인하고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로 돼 있다. 중정측은 김씨를 납치한 것이 ‘국가안전보장 관련사항’임을 선원들에게 주지시킨 뒤 서약위반, 즉 사건내용을 발설하거나 다른 요구를 하는 행위를 ‘반 국가행위’로 못박고 있다. 서약서의 집행인은 사건후 선원들을 꾸준히 관리해온 윤진원(尹鎭遠)해외공작단장이었고, 입회자는 용금호 선원으로 위장한 중정요원 정운길(鄭雲吉)씨였다. 실제로 본보 취재진이 선원 정씨를 만나 확인한 결과 정씨는 당시 윤단장으로부터 3백만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이 서약서를 작성한 시점이 박대통령이 죽고 신군부가 득세한 80년12월29일이라는 점. 중정뿐만 아니라 그 후신인 안기부도 이들에 대한 사후관리를 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윤단장이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정권이 바뀌어 더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선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5공정권하에서는 공작가담자들에 대한 관리는 더이상 계속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 이틀전 윤단장은 영수증을 쓰고 안기부 감찰실로부터 2천만원을 수령한다. 선원들에 대한 회유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밀수사건으로 구속된 임모씨의 경우 ‘해소방안’에 ‘출감조치후 취업’으로 돼있어 중정이 사법부에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마저 일게 한다. 또 선장 이모씨에 대해서는 ‘K해운 취업추진중’이라고 돼있고, 또 다른 선원들에 대해서도 △매점임대계약 추진중 △제주 버스회사 허가시 취업 △공영주택 관리 허가시 취업 등 각종 이권제공과 취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용금호 선원들의 얘기는 다소 다르다. 중정측이 사건후 자신들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한 선원은 “중정측이 취업알선을 약속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윤단장이 술자리 등으로 위로하면서 입에 풀칠할 정도의 용돈을 조금씩 줬다”고 말했다. 이 선원은 “동료선원 중 한 사람은 중정측이 자신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자 ‘집단적으로 반발하자’며 동료들을 부추기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중정측은 이처럼 공작가담요원들과 선원들에 대한 ‘일람표’를 작성, 박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던 것으로 미루어 박대통령은 최소한 사후에 납치사실을 은폐하는 데 방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보가 입수한 문서들의 작성 연대가 각기 다르다는 점도 보고의 횟수가 많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대통령각하께 보고필’이라고 적힌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의 작성일은 박대통령이 죽기 7개월전인 79년3월10일. 하지만 ‘KT사건관여인사 일람표’의 작성시기는 윤진원씨가 복직(77년8월)하기 전인 76년경쯤으로 추정된다. 또 선원들에 대한 일람표는 79년10월1일까지 기록돼 있어 이 보고서들은 중정측이 정기적으로 박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