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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거창高]『남 위해 살라』인성교육 중시

입력 | 1998-02-23 08:47:00


‘월급이 적은 직장을 선택하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겠습니까.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거리겠죠.

경남 거창의 거창고등학교를 방문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 학교 강당 뒤편에 적혀 있는 ‘직업선택의 십계(十戒)’를 읽고 의아해한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는 개척과 봉사, 그리고 희생정신이 담겨있습니다. 다른사람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죠.”

이 학교 고승안(高勝安·53·수학)교감의 설명.

“이 글귀는 거창고의 교육정신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러나 졸업생을 비롯한 모든 학교 구성원들이 평생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시골학교에 불과한 거창고등학교. 이 학교가 대표적인 인성교육 학교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비결은 이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교육정신’때문이다. 학생들을 바른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

거창고는 해마다 90% 이상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을 자랑한다. 올해도 졸업생 1백92명 가운데 서울대 7명을 비롯, 고려대 11명, 연세대 22명 등 거의 전교생이 대학에 진학했다. 이정도면 전국 최고수준이다. 이런 성과는 거창고가 실시하는 ‘자율교육’ 덕분이라는 것이 학교측의 설명.

저녁식사가 끝난 뒤 실시되는 자율학습 시간은 글자 그대로 자율적이다. 어려운 수학문제와 씨름하는 학생,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는 학생, 간디자서전에 빠진 학생 등등. 자율학습에 빠져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감기들었으면 좀 쉬어야지. 무리하면 안돼요.”

“이젠 거의 나았어요. 선생님.”

교사들은 전교생의 이름은 물론 출신지역과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학년당 4학급이며 전교생은 6백명을 넘지 않는다. 작은 학교라야 교사와 학생의 ‘만남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다. 남학생 3명에 여학생 1명꼴.

4월말에 3일 동안 실시되는 봄축제는 이 학교의 정신이 가장 깊게 배어있는 행사다.

반별 경연대회 형식으로 열리는 이 축제는 기획부터 예산집행까지 전적으로 학생회가 주관한다.

전교생은 모두 한가지 이상 종목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 기본. 재주있는 학생들의 독무대가 되지 않고 골고루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다.

“운동경기중 학생들이 다툼을 벌여도 교사들은 구경만 할 뿐입니다. 문제해결 과정을 통해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유일한 총각교사인 체육담당 유천상씨(34)의 설명이다.

겨울의 백미는 토끼몰이. 눈오는 날이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이 인근 야산으로 토끼몰이를 나간다. 이 골짝 저 골짝을 누비며 토끼를 쫓다보면 온몸이 흠씬 젖는다. 토끼를 못잡아도 즐겁기만 하다.

거창고의 독특한 교육방식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외지 학생들의 입학이 부쩍 늘었다. ‘유명인사’의 자녀들도 적지 않다.

기부금을 내겠다는 학부모들도 있지만 이해당사자의 돈은 절대 안받는다는 것이 학교측의 입장. 그래도 내고 싶은 사람은 졸업 뒤에 내라고 설득한다.

지원자가 많아 신입생을 성적으로 뽑을 수밖에 없는 것이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거창고의 최대 고민. 대안을 모색했지만 적당한 선발기준을 찾지 못해 학교측은 불합격자를 줄이기 위해 미리 성적을 검토해 합격할 만한 학생들의 원서만 받고 있다.

16일은 1학년 조한솔군의 생일. 한솔이의 한솥밥 식구인 기숙사 12호실 친구들은 과자와 음료수를 준비해 저녁 때 조촐한 생일잔치를 마련했다. 옆방에서 기타를 빌려와 노래도 부르며 오락시간을 가졌다.

한솔이의 방 동료인 김태후군은 “친구들과 함께 있어 쓸쓸하지 않고 걱정거리가 생겨도 함께 고민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거창고 연락처 0598―944―3755

〈거창〓홍성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