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 밟히며 부서지는 눈과 얼음처럼/그동안 우리가 쌓은 것들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냉혹한 비음의 바람소리/언제쯤 그칠 것인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도종환 ‘세한도’중) 입춘 우수 다 지나 따스해진 바람이 영상으로 수은주를 밀어올려도 누구 하나 “봄이 오네”라고 환하게 웃을 수 없는 구제금융의 혹한기. 그래서일까. 계간지 봄호에 실린 신작시들에는 유난히 꽃소식이 아닌 ‘겨우살이’의 곤고함을 그린 것들이 두드러진다. ‘창작과 비평’봄호에 기고한 도종환 고재종 유안진 시인. 약속이나 한듯 ‘세한도(歲寒圖)’를 제목으로 뽑았다. 농촌시인 고재종은 다 허물어져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그루에서 유배지의 추사가 쓰라린 마음을 의지했던 세한도 속 소나무의 이미지를 본다. ‘날로 기우듬해가는 마을회관 옆/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그 청솔 바라다보는 몇몇들 보아라//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유안진은 허약한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세한도의 서릿발같은 기개로 이 겨울을 버텨나갈 수밖에 없노라고 다짐한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않는 얼음장길을/닳고 터진 알발로/뜨겁게 녹여 가라신다/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세한도 가는 길’중) 고난의 시기마다 한국의 시인들은 ‘겨울’을 노래했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이육사 ‘절정’중)고 식민의 암울함을 한탄하기도 했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양성우 ‘겨울공화국’중)라고 군사정권의 폭압통치를 절규하기도 했다. 이제 또한번의 겨울인가. 그러나 삭풍 앞에 선 시인들은 오히려 이제야 삶이 삶답게 보이노라고 의연하게 노래한다.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며 흥청거리던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생의 남루함이 오히려 귀하다고 한다. ‘…언덕길이 너무 가파르다. 누구나 절벽 하나쯤/품고 산다는 것일까. 발끝이 벼랑이다. 날마다/벼랑끝을 기어오른다. 정상을 정복할 등산가들처럼’(‘겨울 길음동에서’중). 천양희시인은 ‘사는 일이 벼랑끝’이라며 궁지에 몰린 마음들을 다독인다. 목청 큰 시인 고은은 ‘…오늘 지난 30년동안 잊어버린/한반도의 얼굴찾아/제 얼굴로 실컷 밀물 같은 울음을 참아라/참을 인짜 몇자/때마침 바람이 불어닥친다’(‘당대비평’에 실린 ‘눈보라’중)며 이번 시련이 우리삶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해줄 계기라고 역설한다. 가혹한 한 철이 지나가도 깊이 뿌리내린 나무는 죽지않고 봄을 피워낸다. 시인 오세영은 삶도 그렇게 지속되는 것이라고 어깨 움츠린 이들을 격려한다. ‘묻지마/어찌해서 연명한 목숨인가를,/당당한 건 다만 살아있음/그 자체. 확실한 건 다만 서 있다는/그 자체/하늘 아래 生은 별보다 아름답다…어두울수록 빛나서 生은/아름답다/처연하게 아름답다’(‘문학과 의식’에 실린 ‘겨우살이’중)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