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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김종필총리 지명자]영욕 맛본 「風雲의 정치인」

입력 | 1998-02-23 19:14:00


김종필(金鍾泌·JP)국무총리지명자는 흔히 ‘풍운(風雲)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영광스러운 자리에도 있었지만 좌절과 풍상도 겪었다. 때로는 ‘혁명가’로,때로는 ‘굴신(屈身)의 정치인’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무총리 자리에 27년만에 복귀하는 것도 그의 인생 부침사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사범대와 육사를 졸업했다. 그는 35세 때인 61년 처삼촌인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과 함께 ‘5.16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나선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뒤 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렸고 63년 공화당 창당일에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길에 나섰다. 8개월 후에 귀국했지만 이어 대일(對日)청구권문제와 관련된 ‘김―오히라 메모’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2년뒤인 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으나 68년 ‘농민복지회 사건’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69년 박대통령이 추진한 3선개헌에 반대했지만 그는 ‘인간적 의리’를 앞세운 박대통령의 회유에 손을 들고 71년부터 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총리 사임후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JP는 79년 ‘10.26’이 터지자 공화당총재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던 그는 86년 귀국, 다시 일어선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 4위로 낙선했으나 총선에서 충청권의 맹주(盟主)로 정치일선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90년 3당합당에 참여하고 92년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金泳三)후보를 지원해 당선시켰다. 하지만 95년 민자당내 권력투쟁에 밀려 쫓기듯 탈당한 뒤 자민련을 창당, 6.27 지방선거와 4.11총선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해 자민련의 대통령후보로 다시 대선고지에 도전했던 그는 결국 김대중(金大中)후보와 의원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단일화에 합의, 김대중후보를 차기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공동정권의 실세국무총리 지명자로 다시 일어섰다. ▼ 『지금은 얘기할때 아니다』 손 내저어 ▼ 23일 오전 JP는 국회 인준절차를 남기고 있는 ‘불안한 처지’를 의식한 듯 여러가지 질문에 특유의 선문답으로 응했다. 그는 조각 인선과 총리인준 문제에 관한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도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다. 아무리 질문해봐도 소용없다”고 손을 내저었고 한나라당의 인준거부 당론에 대해 불쾌한 심사를 드러냈다. ―앞으로 총리로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나. “(한나라당에서)그것을 잘아는 사람들이 요즘 소리를 많이 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물어보라.”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구시대인물’로 폄훼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나쁜 표현도 있던데, 특별히 좋고 나쁘고 할 이유가 없다. 다 그러는 게 아니고 말하는 사람만 그러는 것 아닌가.” ―입각후보로 여러 사람들이 거론되고 있는데…. “내 입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앞으로 취급하지 않는 게 좋다.” 〈이철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