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3월27일 오전 서울지검 특수1부 김모 검사실. 김검사는 전날 공개된 차관급 1백25명의 재산내용이 실린 조간신문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사정(司正)에 소극적인 검찰수뇌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검사가 차관급 재산공개 내용을 꼼꼼히 뒤진 것도 그래서였다. “혹시 뭔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재산내용을 훑어가던 김검사의 시선이 엄삼탁(嚴三鐸· 현 국민회의 부총재)병무청장의 재산에 꽂혔다. “재산총액 16억2천6백70만원. 직업군인과 안기부 출신치고는 많은데….” 김검사는 곧바로 엄청장의 재산내용 원문을 입수해 다시 꼼꼼히 뜯어봤다.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근무하던 90년 8월 무렵에 서울 서초동의 대형 갈비집 ‘동경가든’의 대지와 건물을 13억여원에 구입했다. 그렇게 큰 돈이 한꺼번에 어디서 났을까.” ▼『엄장군이 벼르고 있어요』▼ 김검사는 곧바로 동경가든의 등기부등본을 떼어 부산에 살고 있는 전소유자 김모씨를 찾아냈다. 이어 김씨의 예금통장에 입금된 동경가든 매입자금의 출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매입자금의 일부는 중소기업은행 서울 삼전동지점에서 나온 수표였다. 삼전동지점은 슬롯머신업자 정덕진(鄭德珍)씨의 동생 덕일(德日)씨가 운영하는 뉴스타 호텔에서 불과 1㎞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엄청장과 정씨 형제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확인 결과 예상은 적중했다. 삼전동지점은 뉴스타호텔의 단골거래지점이었다. 한달 동안 끈질지게 계좌를 뒤진 끝에 마침내 덕일씨가 90년 초 이 지점에 개설한 가명계좌에 1천만원짜리 수표 15장을 입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돈이 엄청장에게 건너갔다는 증거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덕일씨와 엄청장이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돈세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덕진씨의 진술이 필요했다. 김검사는 당시 슬롯머신 사건 주임검사인 강력부 홍준표(洪準杓·현 한나라당의원)검사에게 “계좌추적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덕진씨를 조사했으면 한다”고 연락했다. 그러나 덕진씨는 홍검사 이외에는 누구의 조사도 받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홍검사가 덕진씨의 조사를 대신 맡았는데 그는 의외로 순순히 엄청장에게 돈을 준 사실을 털어 놓았다. “엄씨에게 건네진 수표계좌는 동생이 잘 압니다. 안기부에서 우리 형제가 평민당에 정치자금을 대준 것으로 의심해 조사하는 것을 무마해 달라며 준 것이죠.” 덕진씨와 엄청장의 관계는 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3월 정씨는 안기부 국방담당관으로 있던 엄장군(준장)을 처음 만났다. “평소 잘 아는 건달이 찾아와 ‘엄장군이 형님을 아주 나쁘게 보고 죽이려고 한다’고 귀띔해주었어요. 동생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며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고요. 동생이 소개한 엄장군의 부하(모소령)를 통해 서울 하얏트호텔 일식집에서 엄장군을 만났어요.” 일주일 후 엄씨가 먼저 정씨에게 전화를 걸어 하얏트호텔 앞 중국식당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정씨의 진술. “엄씨는 대뜸 ‘전국의 슬롯머신업자들이 몇 백억, 몇 천억원씩 벌어 정치권에 제공하고 깡패들에게 나눠주고 있어 문제’라며 ‘안기부에서 정화 차원에서 슬롯머신업계를 관리하려고 하는데 내가 책임자’라고 말했습니다.” 정씨는 엄씨에게 잘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씨를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희전호텔로 데려가 1백만원짜리 수표 20장을 주었다. 엄씨는 “앞으로 잘해보자”면서 돈을 받았다. 정씨와 엄씨의 만남은 계속됐다. 90년 2월경 엄씨의 전화를 받은 정씨는 ‘슬롯머신업계 정화를 명분으로 내 사업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기부 안가에서 다시 3천만원을 찔러줬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90년 4월 정씨는 다시 안가에서 엄청장과 마주앉았다. 다시 정씨의 기억. “엄씨는 안기부 수사국에서 내가 평민당에 정치자금을 대주었다며 조사한다고 하더군요. 또 세금을 안낸 것에 대해 국세청에 통보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겁이 덜컥 납디다. 국세청에 통보돼 탈세추징과 함께 검찰에 고발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엄씨에게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 현직 병무청장의 구속 ▼ 이틀 후 엄씨는 다시 덕진씨를 호출했다. 덕진씨는 다시 안가로 찾아가 1천만원짜리 수표 15장을 엄씨에게 주었다. 정씨는 그후 한차례 더 준 것까지 합해 엄씨에게 모두 2억2천만원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서울지검은 엄청장에 대한 조사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당시 서울지검 고위간부의 기억. “엄청장의 수뢰혐의를 보고받은 청와대에서 깜짝 놀라며 ‘틀림없냐’고 물어왔어요. 엄청장은 자신의 슬롯머신비리 연루설이 언론에 보도되자 청와대에 ‘절대 돈을 받지 않았다’고 적극 해명했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김대통령도 엄청장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는 거예요.” 검찰은 청와대에 “엄청장이 돈을 받은게 확실하다. 엄청장을 해임하지 않고 검찰에 나오게 하면 현직 병무청장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의견을 올렸다. 그러나 엄청장은 현직으로 5월18일 검찰에 출두해 다음날 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해임됐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 “92년 초 김대통령이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거의 확정됐을 무렵 안기부에서 김후보 지지로 돌아선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중 한사람이 엄기조실장이었어요. 엄씨는 6공 당시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엄씨는 김후보측에 ‘투항한’ 다른 안기부 간부들처럼 중요한 정보도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6공 말기 김후보가 노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노란 봉투’를 내던지며 따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보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랜저승용차를 타고 서울지검에 도착한 엄청장은 사진기자들에게 여유있는 포즈를 취한 뒤 곧바로 김검사실로 직행했다.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에 마른 체구의 김검사와 젊어서 씨름대회에서 탄 황소가 1백마리가 넘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건장한 체격의 엄청장이 마주앉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됐다. 김검사는 동경가든 매입자금의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 나갔다. 엄청장은 처음에는 “정덕진씨를 잘 알지 못하고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김검사가 계좌추적 결과를 들이대며 추궁해도 엄청장은 “돈받은 사실이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끈질긴 추궁과 부인이 계속되면서 조사실 밖으로 고성이 간간이 흘러나왔다. “청장님,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무조건 잡아뗀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뭐가 답답해서 정씨한테서 돈을 받겠습니까.” ▼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검찰은 결국 계좌추적 결과만으로 엄청장이 검찰에 출두한 지 이틀만인 5월20일 그를 구속했다. 엄청장에 대한 수사 일화 한토막. 엄청장이 구속된 뒤에도 수뢰혐의를 계속 부인하자 홍검사가 하루는 밤늦게 특별조사실에 들어갔다. 홍검사가 들어서자 수사관이 소파에서 자고 있던 엄청장을 깨웠다. 홍검사는 엄청장이 장군 출신이라는 점을 이용했다. “장군님, 나는 방위병 출신인데 군에서 장군은 하늘처럼 알고 지냈습니다. 장군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장군님은 비겁합니다. 육군소장이 방위병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장군의 명예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음날부터 엄청장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변호사와 상의한 뒤에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6월1일에는 1억5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엄씨는 검찰에 출두한 덕일씨의 진술로 돈세탁이 확인되면서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설명. “김대통령은 엄청장이 수뢰사실을 시인했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했어요. 엄청장이 절대 돈을 받지 않았다고 부인해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돈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화를 냈어요.” 그러나 엄씨는 “당시 수사와 관련해 김대통령을 만나거나 전화통화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또 자신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도 “문민정부 출범 후 김대통령 측근들이 자신들과 뿌리가 다른 쪽을 견제하면서 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씨한테서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군이나 사회단체 후원금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엄씨는 1,2심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이 그대로 인정돼 유죄를 선고받았다. 덕일씨는 엄씨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던 94년 1월 “법에 대해 무지한 내가 올바르게 진술하지 못해 엄장군이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다”며 알듯말듯한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기대·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