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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내멋에 산다]덕유산 넉넉함에 푹빠진 허의준翁

입력 | 1998-02-26 19:27:00


크고(德) 넉넉한(裕) 덕유산 정상(1,614m)에 서니 호남의 산들이 파노라마로 들어온다. 무등산 대둔산, 날이 맑을 땐 멀리 가야산 지리산 천왕봉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향적봉 정상 오른쪽 아래에 아담한 빨간 지붕. 덕유산 산할아버지 허의준씨의 ‘산악인의 집’이다.

일명 허대장으로 통하는 그는 내년이면 고희(70)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보인다. 83년 산에 들어왔으니 올해 15년째.

그에게 산맛을 알려준 이는 큰형. 굵은 동아줄을 메고 고향인 개성 송악산을 오르던 형을 여덟살 때부터 따라다녔다. 그후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6·25를 맞아 소위로 임관, 55년 대위로 예편할 때까지 잠시 산을 잊고 살았다. 58년 결혼하면서 미아리에 문을 연 자동차서비스업이 웬만큼 자리를 잡자 슬금슬금 ‘산행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평일 주말 할 것없이 시간나는 대로 산에 올랐다. 서울 근교 북한산 도봉산은 물론이고 지리산 설악산을 2백50여차례 오르내렸다.

그러다 덕유산에 산장을 짓는다는 얘길 우연히 전해듣고 미련없이 보따리를 쌌다. 그때 나이 쉰셋.

대학졸업을 앞둔 막내아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죽기 전에 하고싶은 일을 하다 죽고 싶었다. 속세에서 일궜던 모든 것을 버리고 시작한 산생활.

한겨울엔 1m 넘게 눈이 쌓이는 그곳에서 철저히 혼자가 됐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생필품을 져 나르고 계곡물로 빨래하고 호롱불밑에서 바느질을 했다.

“밥먹고 잠자는 단순한 생활을 해나가니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그는 “모름지기 삶이란 단순해야 잡념이 없다”고 말한다.

산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는 허대장. 이름없는 나무, 새와 풀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면서 세상의 주연은 사람이 아닌 그것들이란 겸손함을 배웠다. 시간도 잊어버리고 하루종일 풀밭에 누워 온갖 모양의 구름들이 나타났다 흩어졌다하는 하늘을 바라보면 속세의 때가 한꺼번에 씻기는 듯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다.

매일아침 집앞에서 만나는 일출. 새벽 구름바다에 걸린 가야산 지리산은 그대로가 한폭의 동양화다. 봄이 되면 지천으로 흐드러진 진달래 철쭉 원추리꽃. 사진찍기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93년엔 국립공원 사진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가 가진 전재산은 서울 변두리의 24평 아파트. 1년에 한번씩 다니러 오는 늙은 아내가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잊어버리고 그래서 뭘 더 갖고싶은 생각도 안난다고 한다.

“금가락지 한개도 부끄러운 요즘, 가진 게 없으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른다”는 그에게 소원을 묻자 “살만큼 살았으니 2,3일 앓다 편하게 눈 감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는 세상사도 그렇지만 산행도 절대 욕심을 내선 안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저 ‘정복욕’에 사로잡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한다.

〈무주 덕유산〓허문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