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3월21일 밤 8시 서울지검 1층 로비.
국민회의의 폭로 이후 청와대에 출근도 안하고 잠적했던 장학로(張學魯)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민회의가 비리의혹을 폭로한 지 11시간이 지난 뒤였다.
장씨는 국민회의의 폭로 직후 해명과 구명운동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는 청와대 기자실에 “동거녀 김미자(金美子)씨의 재산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해명서를 보냈다. 김기수(金基洙)수행실장 등 청와대에 들어간 상도동가(家)의 동료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절대 사실이 아니다”며 호소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반응은 냉담했다. 민정수석비서실에서는 “떳떳하다면 검찰에 들어가서 해명하라”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 청와대 『경찰가서 해명하라』 ▼
오후2시경 검찰도 수사착수를 공식발표했다. 이에 앞서 검찰은 국민회의 기자회견 직후부터 김기수(金起秀)총장과 최명선(崔明善)대검차장 등 수뇌부가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둔 시점에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검찰의 신속한 수사착수 결정에는 장실장 문제에 강경한 청와대의 의중도 반영됐다.
그러면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도 ‘수족(手足)’같은 장실장의 수사를 정말 원했을까.
김기수수행실장의 설명.
“어른(YS)께서 ‘아!’하시면 밑에서 ‘악!’하고 지시를 내려보내는 것이 당시 청와대 분위기였습니다. 정통관료나 법조인으로서 청와대에 들어온 사람들은 우리같은 마당쇠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정 살피지 않고 무조건 단호한 지시를 내렸지요. 어른께서 화가 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게 신속하게 잡아넣으라는 뜻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검찰 수사착수 방침이 공식 발표되면서 장실장도 더 이상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검찰에 나온 장실장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기자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국민회의 폭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검찰에서 나의 결백이 밝혀질 것입니다.”
검찰에도 비상이 걸렸다. 국민회의의 폭로자료 말고는 별다른 수사자료가 없었다. 검찰은 사건의 개요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장실장이 처음에 부인으로 일관하자 검찰은 조사에 꽤 애를 먹었다.
장실장에 대한 조사는 특수1부 박종환(朴鍾丸·현 부산고검 검사)검사가 맡았다.
“왜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는지 아십니까?”
“국민회의에서 저에 대한 부정축재 비리를 폭로했기 때문에 조사받기 위해 자진출두했습니다.”
“37억여원의 재산을 은닉한 것은 사실입니까?”
“그중 일부만 내 것입니다.”
이후 장씨는 ‘모르쇠’작전으로 나갔다. 박검사가 어떤 질문을 해도 “모릅니다” “그 내용도 모릅니다” “그 사실은 더 모릅니다”가 대답의 전부였다.
박검사는 답답했다. 더이상 장씨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사방향을 바꿔 37억여원대 재산의 명의인인 장실장의 동거녀 김씨의 소재를 찾기로 했다.
“김씨 일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아시겠죠.”
“그 사람들, 지금 평창동 올림피아호텔 1158호실에 있습니다. 나도 거기 있다가 오는 길입니다.”
검찰은 22일 새벽 김씨 일가를 연행했다. 특수1부 검사 전원이 달라붙어 이들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들도 처음에는 “모두 우리 돈으로 모은 겁니다. 장실장 돈은 없습니다”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장씨도 검찰에 출두한 지 만 하루가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수사가 난관에 부닥쳤다. 보다 못한 황성진(黃性珍·현 부산지검 제2차장)특수1부장이 직접 나섰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장실장 문제가 큰 현안이 돼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장실장의 재산이 이렇게 많은데 국민이 납득하겠어요. 무조건 부인하는 것이 각하를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황부장의 설득과 추궁에 장실장이 마침내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업인들이 준 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가성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황부장은 장실장 앞에 백지 한장을 내밀며 “돈을 준 기업인의 이름을 적으라”고 다그쳤다. ‘각하’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심경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장실장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기업인 3명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검찰은 즉시 수사관들을 보내 기업인들을 소환했다. 맨먼저 온 사람은 W종합건설 대표 임모회장. 임회장은 장씨에게 돈준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 현직 장-차관도 연루 소문 ▼
임회장의 진술.
“민자당에 관여하면서 장실장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장실장이 점심이나 저녁식사 직전에 가끔 전화를 걸어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 돈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알고 만날 때마다 돈을 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1천만원씩 여섯번 주었습니다.”
임회장은 “장실장이 대통령과 함께 물심양면으로 고생하는 것 같아 금전적인 것에 흔들리지 말고 일을 잘하라고 돕는다는 뜻으로 돈을 주었다”는 변명도 덧붙였다.
곧이어 소환된 H종합개발 장모회장과 L건설 대표 공모씨도 장씨에게 수천만원씩을 준 사실을 시인했다.
검사는 다시 장실장을 불렀다. 모든 것을 체념한 장실장은 검찰이 형사처벌에 필요한 ‘청탁’과 ‘대가관계’를 묻기도 전에 술술 털어놓았다.
“임회장이나 다른 기업인들은 저의 영향력을 믿고 자신의 기업을 보호해달라는 취지로 돈을 주었습니다.”
장씨에 대한 수사가 한창일 때 검찰 주변에서는 현직 장차관도 장씨에게 돈을 주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검찰은 이를 부인했다. 이 소문은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사내용 중 한토막.
“장실장, 장회장의 대출청탁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재무부 관련직원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으나 마땅치 않아 박모 청와대비서관에게 부탁했습니다. 박비서관은 알았다고 했지만 나중에 대출조건이 안돼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러면 장회장에게서 받은 돈을 박비서관에게도 전달했습니까?” 검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돈을 준다고 받겠습니까. 전화로만 부탁했을 뿐입니다.”
검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장차관 관련설’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박검사는 다른 사람들한테서 더 받은 것이 없는지를 캐물었다.
“각하께서 대통령이 되고 보니 야당 생활과 민자당 대표, 여당 대통령후보를 하면서 만난 많은 분들이 각하를 만나기 어렵게 됐습니다. 주로 기업하는 분들이었는데 각하께서 자신들에게 계속 관심을 갖게 해달라는 취지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적게는 2백만∼3백만원씩, 많게는 1천만∼2천만원씩 주었습니다.”
“기업인들한테서 받은 돈은 얼마나 됩니까.”
“월 평균 2천만원 내지 1천만원이었는데 일부는 사무실 경비로 쓰고 나머지는 사무실 책상서랍에 넣어뒀다가 집에 갖다 주었습니다.”
검찰 고위간부의 설명.
“조사해보니 일부 기업인들은 특별한 청탁이 있어서가 아니라 김대통령의 동정이나 청와대 분위기 등을 알기 위해 용돈 명목으로 장실장에게 돈을 주기도 했어요. 장차관이나 정치인들도 김대통령을 만나러 가면서 문앞을 지키고 있는 장실장에게 1백만원 안팎의 돈이 든 봉투를 건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팁’인 셈이죠. 장실장은 그런 돈을 받으면서 돈맛을 알았고 나중에는 직접 챙기게 된 것 같아요.”
장씨는 검찰에서 처음에 좀 버티기는 했지만 곧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청탁관계도 인정했다. 왜 그랬을까.
상도동 가신(家臣)출신 인사의 설명.
“우리 가신들은 야당시절 숱하게 경찰 검찰에 불려가 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속성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학로는 달랐죠. 학로는 평생 각하 곁에서 집사노릇만 했기 때문에 잡혀갈 일도 없었고 그래서 피의자로서의 노하우도 없었던 겁니다.”
▼ 단골식당 주인도 돈 내줘 ▼
장씨는 나중에 YS가 단골로 다녔던 음식점 주인 권모씨에게서 6천만원을 받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권씨의 진술.
“김대통령 취임 하루 전인 93년 2월24일 김대통령이 저를 민자당 대표실로 불렀어요. 그때 옆에 있던 장실장에게 ‘권사장에게 신세를 많이 졌는데 장군이 잘 보살펴드려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그후 장실장에게 가끔 연락하고 지냈는데 하루는 장실장이 식사를 하면서 ‘현재 살고 있는 집이 형편없다. 큰 아파트로 이사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제 느낌으로는 ‘돈 좀 달라’는 뜻으로 들려 5천만원을 주었습니다.”
장씨사건이 터지고 2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은 여러 면에서 새 정부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고 있다.
김기수 전수행실장의 고백.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정부는 청와대 부속실을 책임지는 총무비서관으로 여성인 박금옥(朴今玉)씨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국내 정치인이나 기업인들과 특별한 인연이 없습니다. 또 여성이기 때문에 용돈 구걸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겁니다. 동교동 가신들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것도 결국 우리의 시행착오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기대·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