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총리인준 대치’ 이후 정치권에서 정계개편은 미래형이 아닌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벌써 곳곳에서 여권과 야 일부 세력의 은밀한 교섭이 감지된다. 물밑의 정계개편 징후가 수면위를 향해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3·3조각’ 결과는 국민회의와 자민련 양당 실세들이 대거 입각하는 ‘친정체제 강화’로 드러났다. 총리인준동의가 국회에서 무산된 상황에서 이뤄진 조각내용은 김대통령의 정국장악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계개편이 빨라질 것임을 예고하는 바로미터로 보인다.
현재 진행되는 정계개편 논의의 큰 축은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및 국민신당 내 민주계, 자민련과 한나라당 내 민정계 두갈래다.
먼저 국민회의와 범민주계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민주계의 축은 이수성(李壽成)전총리나 서석재(徐錫宰)의원 등이 될 것이다. 국민회의측 메신저로는 과거 ‘야당 동지’였던 김상현(金相賢)의원과 한광옥(韓光玉)전의원 김영배(金令培) 한화갑(韓和甲) 김옥두(金玉斗)의원 등.
동교동계의 한 인사는 “총리임명동의안 처리과정에서 야당인사들을 접촉한 결과 10∼20여명은 언제든 들어올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들 중 일부인사는 동의안 가결이 무산된 3일 새벽 은밀히 찾아와 “나는 찬성투표를 했다”고 ‘신고’까지 했다는 것.
국민회의와 민주계 두 세력의 뒤에는 김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2일 총리인준동의안을 둘러싸고 여야 대결이 벌어졌을 때 국민회의 내에서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김전대통령이 한나라당과 국민신당 민주계인 K, K, S의원 등에게 전화를 걸어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당부했다는 것. 물론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같은 소문은 ‘동교동’과 ‘상도동’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두 세력이 뭔가 모색하고 있다는 단초는 얼마든지 확인된다. 퇴임 직전 김전대통령이 민주산악회 인사등에게 “김당선자를 적극 도와야 한다”고 당부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김전대통령이 정부조직개편으로 폐지위기에 놓였던 해양수산부의 존치를 건의, 김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인 것도 양측의 ‘신밀월(新蜜月)시대’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김대통령과 이수성전총리의 관계도 근접권에 있다. 김대통령은 취임전 이전총리가 주도한 소파 방정환(方定煥)선생기념행사에 직접 참석했다. 또 측근을 통해 이전총리와 ‘핫 라인’을 형성해 놓은 상태다.
이들 세력간에 의기투합이 이뤄지면 과거 민추협을 복원한 ‘신민주대연합’ 구도의 탄생도 가능하다는 것이 국민회의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나라당 민정계를 향한 자민련의 유혹도 은근함을 더해가고 있다. 민정계에 대한 흡입력을 지닌 인사는 박태준(朴泰俊)총재. 민정계내 상당한 인맥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그가 행동을 개시하면 민정계는 적지 않게 동요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직전 자민련을 탈당, 한나라당에 들어간 일부 영남권 인사들이 복당을 원한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국민회의와 민주계의 결합이 조직적이라면 자민련은 개별적 몸불리기의 형식을 밟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정계개편의 시점이다. 양당 관계자 모두 당초 예정했던 6월 지자제선거 직후보다 훨씬 빨라질 것으로 관측한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관계자는 “3월말로 연기된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전 정치권에 지각변동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윤영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