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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 (21)]勉庵 최익현의 순국

입력 | 1998-03-05 19:57:00


구한말 항일구국운동의 선봉이자 유림(儒林)의 최고봉이었던 면암 최익현. 1906년 유배지인 일본 쓰시마(對馬)섬에서 단식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그는 정말 굶어 죽은 것일까.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즉 단식사가 아니라 단식의 후유증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죽음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익현이 쓰시마섬에 유배된 것은 1906년 7월. 전북에서 의병투쟁을 주도하다 관군에 잡혀 곧바로 일본군에 넘겨졌고 일본군은 그를 쓰시마섬에 유폐시켰다. 최익현이라는 인물이 조선 땅에 남아있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최익현은 일본군의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단식에 돌입했다. “왜놈이 주는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는 외침과 함께. 단식이 계속되던 어느날 최익현은 일본군 수비대장으로부터 자신의 식사비는 조선의 국왕이 보내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말은 곧 어명(御命)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꿇어엎드려 개항 반대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고 단발령을 내린 고종 앞에서 “40년 군신(君臣)의 의리는 여기서 끝났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쳤던 최익현이었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단식을 중단할 수밖에.

그러나 그의 나이 이미 74세. 노령의 나이에 옥중생활은 무리였고 그로 인해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병사했다.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도 있다. 1906년 12월20일의 일. 이렇게 그는 생을 마감했지만 그 죽음이 너무나도 극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단식사라 오르내린 것이다.

그의 시신은 보름남짓 지나 부산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은 운구행렬을 뒤따르며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지금의 우리에게 최익현이 단식중에 죽었든 단식 후유증으로 죽었든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중요한 것은 최익현의 삶과 죽음이 의롭고 순결하다는 사실일 따름이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