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에 몇 마일 더 가야 할 길이 있다’는 프루스트의 시구(詩句)를 읊던 김종필(金鍾泌·JP)씨 앞에 지금 남아 있는 ‘더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은유(隱喩)와 상징을 즐기는 그 낭만적 시심(詩心)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JP는 빠져 있다. 나아가고 물러나고, 움직이고 기다릴 때를 가릴 줄 아는 심원(深遠)한 지혜를 지녔다는 JP로서도 헤어나기 어려운 진퇴유곡이다.
▼ 자만한 與 스스로 덫에 ▼
애당초 일이 이렇게 꼬일 것을 예측한 사람은 꽤 많았다. ‘JP총리 절대 불가’를 일찍부터 공언한 한나라당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도 여권은 개의치 않았다. 선거에 진 야당의 한때 분풀이 제스처쯤으로 치부하고 결국은 국민의 ‘애국적’ 여론 앞에 지리멸렬하게 굴복하리라고 낙관하는 듯했다. 소수여당의 거대야당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묵살이었다. 그것이 야당의 전의에 불을 붙였다.
야당은 옹졸하고 여당은 자만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 대한 90% 이상의 인기가 죄라면 죄였을 것이다. 여당은 힘겨루기로 밀어붙이다가 꼼짝달싹하지 못할 덫에 걸렸다. 야당은 실질적으로는 공개투표지만 형식상으로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JP총리를 거부했고, 여당은 명분을 앞세우며 국회를 무시하고 헌법을 어겼다. 이 힘겨루기는 2일의 국회 인준투표가 합법이냐 위법이냐, 총리서리가 합헌이냐 위헌이냐 하는 어려운 법률문제로 변질됐다.
그러나 본질을 얘기하자면 ‘JP문제’의 핵심은 JP 자신이다. DJP공동정권을 와해하려는 의도든, 한나라당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는 의도든 야당은 어쨌든 JP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일관된 주장이다. 나라를 망친 당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몰아붙여서 풀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회해산권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또는 정계개편으로 여야 구도를 뒤집어놓지 않는 한 여당은 야당의 숫자에 밀릴 수밖에 없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JP문제는 시작됐고 악화됐다. “총리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국민이 허리 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고 한 JP의 ‘가야 할 길’이 꽉 막힌 형국이다. JP의 길만 막힌 것이 아니라 국민이 허리 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까지 막혔다. 이 국난의 시기에 할 일이 태산같은 국회의 문을 JP문제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의 선택도 JP의 선택만큼이나 어렵다. 무엇보다 JP 없는 DJP정권은 완전 소수파 정권이 된다. 선거때 JP에게 한 약속도 있고 자신의 집권과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실현시켜준 JP에 대한 고마움도 있다. 그래서 청문회의 ‘청’자도 꺼내지 말라는 JP의 뜻을 받아들여 선거공약인 인사청문회까지 유보하며 ‘JP총리’를 위한 ‘정치적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러고도 JP문제는 더 꼬였다.
▼ 매듭풀 사람은 JP뿐 ▼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은 JP 뿐이다. JP가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남은 몇 마일’이 내각제를 말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그 가야 할 남은 몇 마일이 막혔다. 막힐 때는 돌아가는 것이 그가 자주 인용하는 상선여수(上善如水)의 이치일 터이다. 박정희(朴正熙)시대의 불우했던 한 시절, 그는 목수가 집을 짓는 것은 자기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명언을 남겼다.
좌절과 풍운의 한평생을 살아온 노(老)정치가에게 손아귀에 들어온 마지막 행운의 기회를 내놓으라고 대놓고 권하기는 어렵다. 본인이 결단할 일이다. 다만 예로부터 사양하고 물러서려면 ‘가장 행복한 때(上盛時)’를 고르라고 했다. 더구나 그 물러남이 난국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이 따로 없겠다. JP의 짐이 너무 무겁다.
김종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