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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돋보기 답사]조선시대 춘화

입력 | 1998-03-11 07:08:00

신윤복의‘月下情人’


남녀의 성(性)풍속을 그린 춘화, 춘화도. 유교적 도덕이 지배한 우리 전통 속에서 춘화는 어떤 모습일까. 남녀의 애정풍속을 주로 그린 혜원 신윤복의 작품은 과연 춘화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춘화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19세기경. 물론 그 이전에도 춘화는 끊임없이 그려졌지만 현재까지 전해오는 작품이나 관련 기록은 거의 없다.

19세기 춘화의 특징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초에 걸쳐 활약했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화풍을 모방한, 가짜 단원 혜원의 춘화가 많이 나돌았다는 점이다. 단원 혜원의 호가 적혀있고 버젓이 도장까지 찍혀있지만 호도 틀리고 도장도 틀리는 등 가짜임이 금방 드러난다. 거의 전부가 가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

그러면 당시 춘화가들이 가짜 단원 혜원춘화를 만들어낸 까닭은 무엇일까. 대가들의 작품인양 꾸며 형식상으로나마 춘화의 격을 높임으로써 값을 올리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비록 춘화라 할지라도 무명작가보다는 대가의 작품을 선호하는 독자들의 성향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또한 단원 혜원의 이름을 빌려 사회 저변에 깔려있던 유교적 장벽을 돌파해보려는 의도도 숨어있다.

춘화는 기본적으로 인간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19세기 춘화는 당시 사회의 적당한 낭만과 적당한 퇴폐가 맞물린 자유분방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상업 도시발달 등 그 무렵 싹트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사회변화를 반영한 미술장르인 셈이다.

당시의 춘화는 사랑방 대청마루 우물가 들녘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남녀의 뜨거운 사랑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춘화는 그러나 노골적인 성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사람 살아가는 모습, 즉 인간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재현해보려는 노부부(老夫婦)의 안타까운 몸짓, 집주인과 하인의 사랑을 훔쳐보는 하녀의 호기심어린 표정,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은채 사랑방 댓돌에 놓여있는 남녀의 신발만을 묘사한 그림 등. 이태호 전남대교수는 “이러한 진솔함 낭만 해학 등은 중국 일본의 춘화와 구분되는 조선적인 멋”이라고 말하고 “이는 당시 사회를 인간이 살았던 역사로 복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처럼 나름대로의 격을 지닌 춘화는 많지 않다. 단원 혜원풍을 모방한 것 중 일부만이 이에 해당할 뿐, 대부분의 춘화는 지나치게 노골적 선정적일 따름이다.

혜원의 경우 남녀간의 애정풍속을 그리되 시종 은근함과 품격을 잃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노골적이고 속된, 좁은 의미의 춘화가 아니라 낭만적이며 예술로 승화된, 넓은 의미의 춘화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혜원의 애정풍속화이다. 즉 춘화이되 춘화를 넘어서는 절제와 품격, 이것이 있기에 혜원의 그림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