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2월10일 서울 롯데호텔 36층 메트로폴리탄 클럽.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당선자는 가스공사 사장 이경식(李經植·전한은총재)씨와 단둘이 만났다.
문민정부 초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맡아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그러나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YS는 대선 당시 통일국민당 대통령후보로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鄭周永·CY)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후보가 돈을 엄청나게 뿌리면서 나를 몹시 애먹였어요. 재벌총수가 대통령후보가 돼서는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선거가 끝난지 석달이나 됐지만 정씨에 대한 YS의 감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YS와 CY. 야당총재와 재벌회장으로서, 정계와 재계의 양대 거목인 두 사람의 인연은 92년 2월 CY가 국민당을 창당하고 정계에 입문함으로써 악연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당 창당 직후만 해도 CY는 YS를 국민당의 대통령후보로 옹립할 생각까지 가졌을 정도로 관계는 좋았다.
김동길(金東吉·현 태평양시대위원회이사장)전국민당 최고위원의 설명.
“창당 직후 정주영씨는 YS에게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못받을게 뻔한데 우리 당에 와서 대통령후보 하는 게 어때요’라며 국민당 입당을 권했어요. 그 말에 YS는 ‘정회장, 내가 틀림없이 될테니 공천받으면 나좀 도와줘요’라고 했답니다.”
YS 뇌리에 박힌 ‘정치인’ 정주영씨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일까. 92년 대선 당시 YS 핵심참모의 증언.
“YS는 정씨에 대해 배신감과 함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14대 총선 후 정씨가 찾아와 ‘김총재님, 걱정마십시오. 나는 절대로 대권 도전은 안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는데 돌아서서 그만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정씨는 선거과정에서 갖은 험구로 YS를 몰아붙였다.
“YS는 변화와 개혁을 하겠다고 하는데 누런 호박에 검은 줄 친다고 시원한 수박되겠습니까. 흰머리 염색하고 빨간 넥타이 매고 구두굽 높게 한다고 그것이 변화고 개혁입니까.”
“하다못해 시골면장도 인격자여야 하는데 면장감도 안되는 사람이 대통령한다고 난리를 칩니다.”
YS 측근들은 조심스레 정씨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정책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됐던 전병민(田炳旼)씨의 기억.
“대선 때 정씨를 ‘죽이기 위해’ 건강 문제를 폭로하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마침 정씨를 20여년 동안 체크해온 주치의 출신이 모지구당 부위원장이어서 여의도 63빌딩에서 박관용(朴寬用)의원과 함께 만났어요. 정씨 쪽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폭로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고 너무 치명적인 내용인데다 공개할 성질이 아니라는 판단이 우세해 결국 폭로계획은 폐기처분됐습니다.”
선거전이 무르익어가면서 YS에 대한 정씨의 인신공격 수위는 높아만 갔다. YS는 선거막판에 정씨가 자신에게 합류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변정일(邊精一·현 한나라당의원)당시 통일국민당 대변인의 설명.
“정주영씨는 대선후보를 사퇴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어요. 오히려 당선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말이 거칠어진거죠. 정씨의 중도사퇴설을 불식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YS를 공격하고 갈등구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죠. 호남표보다는 영남표를 공략하는게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선 직전인 92년 12월5일 현대중공업 경리부 직원이었던 정윤옥(鄭允玉)씨가 현대중공업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나왔다.
“현대중공업이 92년 8월 이후 3백5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이중 2백20억원을 국민당에 선거자금으로 제공했다.”
국민당 대변인실에서 일했던 관계자의 설명.
“현대중공업 비자금사건은 선거를 앞두고 수세에 몰린 YS 진영이 사주해서 터뜨린 정치적 사건입니다. 폭로 기자회견이 새벽 1시반에 열린 사실이나 경찰이 기자회견장을 삼엄하게 경비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14대 대선이 YS의 승리로 끝나고 한달쯤 지난 93년 1월경. YS의 한 비서관은 정씨와의 대화를 은근히 진언했다. “정주영씨를 한번 만나셔서 이제 경제인으로 돌아가라고 하십시오.”
“안돼. 그러면 DJ도 만나고 박태준(朴泰俊)씨도 만나란 말이야.”
“그게 아닙니다. 정주영씨는 대선 때 경쟁자였지만 한국에선 없어서는 안될 몇 안되는 경제인입니다.”
그러나 정씨에 대한 YS의 감정은 바뀌지 않았다. 덩달아 YS의 대(對)재벌관까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다른 비서관의 설명.
“YS는 기업을 얘기할 때 거친 표현을 썼어요. 재벌에 대한 시각이 그만큼 부정적이었죠. 재벌을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장본인으로 생각한 겁니다.”
정씨는 대선이 끝난 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93년 1월14일 김해공항을 통해 해외로 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출국 당일 눈이 오는 바람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자 예약을 취소하고 말았다.
당시 고위 수사 관계자의 설명.
“김해공항 출입국 관리 직원이 정주영씨의 출국시도 사실을 서울지검에 알려왔습니다. 해외도피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법무부에 출국금지 조치를 요구했죠. 당시 이정우(李正雨)법무부장관은 보고를 받고 구두로 즉시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출국금지조치를 구두로 내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죠.”
검찰은 정씨에게 1월16일 오전에 출두하도록 통보했다. 그러나 정씨는 출국을 포기한 다음날인 15일 사전연락도 없이 검찰에 출두했다.
15일 오전10시 검찰에 출두한 정씨는 여지없이 ‘추락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몹시 비통해했다.
쏘나타 승용차편으로 서울지검에 도착한 정씨는 취재진의 카메라에 부딪혀 이마가 1㎝ 가량 찢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정씨는 “이게 뭐야, 피까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무려 10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정씨 변호를 맡았던 변정일의원의 설명. “공소사실이란 게 수긍하기 힘든 것들이었어요. 실정법 위반이라고 보기 힘들었죠. 가령 이런 겁니다. 한번은 CY가 당원교육을 하면서 ‘멕시코는 경제전문가인 살리나스가 대통령이 되면서 경제가 부흥했다. 우리나라도 경제를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사전선거운동이라고 하더군요.”
YS 핵심참모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를 손보지 않으면 나라도 안되고 개혁도 안되고 재벌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 수사관계자의 증언.
“정씨는 1월16일에 출두하도록 통보됐는데 갑자기 사전연락도 없이 15일 오전에 출두했습니다. 검사실로 들어서는데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더군요.‘반창고라도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비서가 아산재단 소속 병원에 전화로 왕진을 요청하더군요. 조사과정에서 정씨는 모든 것을 무조건 부인했습니다. 증거를 들이대도 막무가내였어요. 그러나 증거가 워낙 확실해 기소했습니다.”
불구속 상태로 기소된 정씨는 결국 93년 11월 대선법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씨는 94년7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교도소 신세만은 간신히 면했다.
정씨에 대한 YS의 보복은 정신적인 패배감과 무력감을 안겨주는데 집중됐다. 정씨는 대선법 위반과 횡령혐의로 12번이나 법정에 드나들어야 했다.
YS는 정씨에 대한 감정을 풀지는 못했지만 정씨와 현대그룹을 분리해서 처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현대그룹은 건드리지 않겠지만 정씨 일가는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청와대 비서관의 전언.
“YS는 현대의 노사분규로 신경제를 망칠까봐 상당히 애간장을 태웠어요.박관용비서실장과 박재윤(朴在潤)경제수석비서관을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해서는 ‘현대 어떻게 됐어, 노사분규가 풀릴 기미는 있어’하며 묻곤 했어요. 그러다가 정씨가 93년 7월 중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경영에 복귀하겠다고 하자 YS가 대로한 것이죠. 노사분규도 챙기지 못하면서 경영에 복귀하겠다고 하니 화가 났던 겁니다.”
그러나 ‘신경제 정책’이 실패할까봐 애를 태우면서도 현대가 잘되는 것은 보기 싫었던 것일까. 청와대 측근들과 재무부가 앞장서서 3년 동안이나 금융제재로 현대그룹의 목을 죄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YS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방조했다.
한 시중은행 고위임원의 설명.
“출신성분을 떠나 결격사유가 없으면 누구든지 선거에 출마할 수 있습니다. 기업인이라고 해서 안된다는 법은 없지요. 물론 정씨도 정치에 뛰어들어 한국 경제의 고질병인 정경유착을 부추긴 죄가 큽니다. 그러나 YS는 겉으로는 정경분리를 외치면서 사감(私感) 때문에 경제살리기라는 대사(大事)를 그르쳤어요. YS의 몰락은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입니다.”
〈이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