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痛史)’와 ‘혈사(血史)’. 박은식의 민족주의 역사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두 역저 ‘한국통사(1915)’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말한다.
우리는 왜, 어떻게 망했는가를 서술한 것이 통사이고 어떻게, 왜 싸웠는가를 기록한 것이 혈사다. 글자 그대로 통사는 나라 잃은 눈물의 기록, 통탄의 역사이고 혈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피어린 투쟁의 기록이다.
‘나라는 망했어도 그 역사만 잃지 않는다면 민족은 멸망하지 않고 다시 독립한다’는 그의 신념이 배어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왜 통사를 썼을까. 박은식은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일제에 나라를 뺏긴 한국, 그 망국사를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발해가 그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과 영토까지 잃어버린 쓰라린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국혼(國魂)을 간직하고 광복을 확신하기 위해 이 통사를 쓴다.”
한국통사가 다루고 있는 시대범위는 1864년 고종 즉위때부터 1911년까지. 박은식은 대원군과 관련,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강화를 위한 내정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탓에 도약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보고 한국의 통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까지를 다룬 혈사는 일제의 침략과정, 조선총독부의 학정을 폭로하고 한민족의 항일투쟁을 3·1운동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통사는 한국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한 책, 혈사는 근대적 역사서술방식으로 쓰여진 최초의 독립운동사 개설서로 평가받고 있다.
통사를 쓰고 혈사를 준비중이던 1919년 9월. 박은식은 그의 회갑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통사를 썼고 혈사도 쓰거니와 반드시 광복사도 쓰고야 말리라.” 1925년 순국으로 그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이 책들이 광복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간행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