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뒤 런던을 경유하여 귀국하는 길에 영국 적십자사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곳 심인(尋人·사람을 찾는 일)사업부에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50년 6·25동란 당시 우리 정부의 사회부 소속 중견 공무원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연수중이던 K씨가 서울에 있는 가족의 안부와 소재를 알기 위해 조회서를 제출했는데 적십자사측은 처리절차가 끝난 뒤에도 관련 파일을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이 곳에 이처럼 비치돼 있는 개인별 색인 카드는 30만건이 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봉사원들이 교대로 일하면서 조회의뢰서와 함께 접수된 자료와 처리사항을 정리, 해당 파일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영국 적십자사의 심인사업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 병설 중앙심인사업국(CTA)의 작업방식에 따른 것이다. 1870년에 발족된 CTA는 특히 과거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란과 기타 각종 재난으로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의 색인 카드 4천2백만여건을 비치하고 그들의 생사소재(生死所在)를 찾아주고 있어 ‘인도주의 백화점’이라 불린다.CTA가 오래된 가족자료들을 보존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후손들이 자기 가족구성원간의 유산처리 등 친족상속법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증거자료를 요청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통일 이후 친족법이나 상속법상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월남한 실향민 1세 및 기타 사망자들과 북한에 살고있을 가족간에 예상되는 분쟁을 조정하는데 있어 CTA의 경험이 적용될 수 있다. 새 정부가 남북이산가족의 교류촉진을 위한 방안으로 설립할 뜻을 밝힌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는 이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정보통합센터가 1천만 이산가족을 실명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40만여명(95년 인구조사기준)의 북한출생 고령자 명단을 중심으로 한 색인 카드를 작성해야 한다. 새정부가 진실로 실향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정보통합기구의 설립을 서두르기 바란다. 그것은 남북이산가족 재회사업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최은범(전 적십자인도법연구소장)